논단

국민과 인민

김형태/ 변호사

정치인, 기자, 목사, 변호사, 교사. 모두 말로 먹고 사는 직업들이다. < 수타니파타>에 사람은 태어날 때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오는데 어리석 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는 구절이 있지만, 말 많은 이 직업들은 자칫 제입에서 나온 말로 제 발등을 찍기 십상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 직업군이기도 하다.

국민이라는 괴물

마하트마 간디도 말 가지고 먹고 사는 정치인이요 교사요 변호사였지만 그는 매주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진리 숭배자에게 는 침묵이 정신적 훈련의 한 부분이라는 그의 지론은 말장사 정치인에게 는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정치인과 진리숭배? 하지만 ‘진리파지’( 진리를 굳게 잡는 것)를 목표로 삼았던 간디의 정치는 인도와 세계에 커 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세대교체를 자신의 정치신조로 삼았던 이 땅의 어느 정치인은 그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정치의 세계는 역동적이며 규범이나 약속이 아니다. 나는 국민의 부름에 따르기로 했다.” 정치가 규범이나 약속이 아니라면 진리파지와는 더더욱 상관이 없다는 말인데 그뒤에 따라나오는 국민의 부 름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 국민의 부름은 규범이나 약속, 진리파지 보다 더 상위에 있는 개념이라는 뜻인가.

그는 과거 도지사 경선에서 패배한 경쟁자가 탈당하자 민주주의의 기초상 식도 못 갖춘 정치도의를 저버린 자라고 비난했다. 이제 민주주의니 정치 도의니 하며 그가 던졌던 말은 도끼가 되어 자신의 발등을 찍고 있다. 그 래서 서양의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노코멘트를 외쳐대는가 보다. 말을 안 하면 속생각이 무엇이든 최소한 나중에 말을 바꾸었다는 비난만은 피할 수 있으니 노코멘트는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약삭빠른 방책 이다.

해방 후 50년 동안 우리 정치인들의 최고명분은 국민의 뜻이었다. 그래서 찬성한 사람의 소수점 이하를 반올림해서 개헌을 한 것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탱크를 앞세워 시월유신을 한 것도, 광주에서 국민들을 학 살한 것도, 3당합당을 한 것도 모두 국민의 뜻이었다. 이제 약속을 저버 리는 것도 국민의 뜻이니 그 국민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괴물인가. 국민이 괴물인 것을 잘 간파했기 때문일까. 교육부는 국민학교에서 국민 을 떼어내고 초등학교라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나라의 근본인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엄숙히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권력의 근원인 국민을 저 코스모스 팔랑대는 시골 학교 간판에서 지워버 린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국민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국가에 복종하 는 백성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럽에서 근대민족국가의 성립이 제일 늦은 독일이 군국주의를 이념으로 통치대상인 백성들을 민족국가의 틀 안에 묶으면서 나온 말이 국민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국민은 국 가의 주인이라는 뜻보다는 국가권력의 통치대상이라는 성격이 더 강하다.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해도 그렇다. 우리 국민도 4년이나 5년마다 투표소에서 붓뚜껑으로 도장 찍는 10초 정도의 시간 동안만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분단의식이나 성장제일주의, 지역주의라는 세 가지 마술에 걸려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도장을 눌러대니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문은 그저 듣기에 아름다운 말일 뿐이다. 루소의 말마따나 투표용지가 투표함에 떨어지는 순간 이후로 4, 5년 동안 권력은 경찰의 최루탄이나 체포영장, 군대의 총구, 재벌의 돈, 언론의 곡 학아세하는 펜대 그리고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일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다. 그러 나 이는 5천명 정도의 구성원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나라 일을 결정하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요즈음의 국가규모에서 민주주 의란 그저 '나'를 잘 다스려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뽑는 제도일 뿐이다.

나를 잘 다스려줄 수 있는…

국민학교에서 국민을 빼버린 것은 탁견이다. 국가 통치대상으로서의 국민 에 대신할 수 있는 말은 없을까. 80년대에는 민중이 유행했고 요즘은 시 민이 그 세를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를 설파 한 링컨의 연설을 이렇게 번역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 북한에서 이 말을 쓰는 바람에 우리 사회에서는 사라졌지만 본래 계급적 색채는 없는 말이니 아직도 영한사전 people 난에는 인민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국가권력의 지배대상으로서의 국민이 아니라, 국가와 상관없이 혹은 국가 에 대하여 자유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유인으로서의 인민. 잃어버린 이 말에 상응하는 새 말을 찾자.

그리고 정치인들에게는 국민학교 간판에서도 사라져버린 피통치자 국민의 뜻을 열심히 따르라 하자. 통치자인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