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

‘영구’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 아이들은 흔히 ‘영구’라 불린다. 철수니 영희니 하는 이름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영구임대주택’의 ‘영구’가 그들의 통칭이 되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대개 구청으로부터 가구당 월 10만원 정도의 보조를 받아 생계를 이어가는 거택보호자·지체부자유자·영세민의 아이 들이다. 바보스럽고 말썽많고 지저분하고 가난하고 공부못하고 사고만친 다는 느낌부터 주는 이 ‘영구’란 이름 속에는 이들에게 던져지는 따돌 림이 빼곡하다.

추석을 전후해 어린 영구 가운데 서너명이 또 ‘사고’를 저질렀다. 이미 신문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이 사고 속에서 수많은 영구 가 지금 준비하고 있고 또 앞으로 선택하기 십상인 극단의 행로를 발견하 려는 이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버려진 불운 앞에서 스스로 허물 어지거나 자신을 버렸다고 믿는 사회에 대해 맹목의 복수를 도모하는 게 대개 영구의 선택이다.

한가위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18일 자신이 살고 있던 대구시 달서구 영구 임대아파트 1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16세 김아무개(중3)군은 스스로 무 너진 극단의 사례였다. “친구들은 추석이라며 들떠 있는데 우리 형제는 갈 곳이 없어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엄마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 그와 단둘이 살던 동생은 ‘아버지 차례상도 차려 드리지 못해 몹시 안타까워했던’ 형을 생각하며 둘만의 추석을 이렇게 전했다. 자살한 김 군은 지난 90년 아버지가 공장에서 안전사고로 숨졌다. 식당을 운영하던 어머니마저 1년여 전에 가출했다. 12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중학교 1년생 인 동생과 함께 살던 형제는 그동안 어머니가 남긴 빚 때문에 빚쟁이들한 테서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이보다 앞서 지난 2일 세살짜리 유아를 단지 ‘놀린다’는 이유로 개천에 빠뜨려 죽인 또다른 어린 ‘영구’는 두번째 경우의 극단적 행로를 보여 준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죽은 아이가 별명을 부르며 놀려 기분이 나빠 형에게 천변에 빠뜨려 죽이자고 제의해 함께 죽였습니다.” 그게 말 못하는 동네 꼬마를 죽인 이유의 전부였다. ‘살인범’ 최아무개(12)군과 이아무개(8)군 역시 대전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와 그 주변에 산다. 이들도 영구란 이름에 꼭 알맞은 극빈계층의 결손가정 출신이다. 최아무개군은 알코올중독자인 의붓아버지와 날품팔이를 하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이군 역시 한살 때 어머니가 가출했으며 초등학교 5학년인 형과 함께 살 고 있다. 한결같이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자살로 짧은 삶을 끝낸 영구에겐 ‘온정’이 쇄도고 아이를 죽인 다른 영 구에겐 ‘도덕불감’을 개탄하는 질책이 쏟아진다고 한다. ‘조용히 사라 진 문제아’에 대한 온정으로 그 동안의 무관심을 위안삼고 ‘위해를 끼 친 문제아’에 대한 처벌과 질책으로 재발을 피하려는 것일까. 이들을 하 나의 끈으로 묶고있는 가난과 결손 그리고 따돌림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찾는 노력은 어디서도 안보인다.

50년대 멕시코의 빈민가를 대상으로 한 인류학적 보고서 <산체스네 아이 들>은 지금도 가난의 문제를 접근하는 이들에겐 고전으로 꼽힌다. 저자 오스카 루이스는 이 책 서문에서 인류학자 C.P. 노우의 말을 빌려 이렇게 한탄했다. “사람들이 이제는 가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어버려 불우한 사람들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들과 이야기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 결과는 어떠할까. 가난과 결손으로 인한 피해는 그들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미국의 한 조사보 고서에 따르면 한 사람의 문제아가 평생 사회에 끼치는 손실은 정상인 3 명이 평생 일궈내는 사회적 생산과 마찬가지의 크기라고 한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