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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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의 한가운데로 성큼 접어들었다.
결실의 계절 9월이 서서히 그 뒷모습을 보이면서 나뭇잎새는 그 푸름을
잃어간다. 이제 10월의 손짓. 하루가 다르게 그 빛이 갈색으로 물들다 이
내 붉은 단풍이 온 산을 불사를 ‘만산홍엽’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
이다.
붉은 단풍은 갈숲에 몇 그루만 섞여 있어도 온 산이 다 붉게 보이고, 마
치 숲을 온통 불사르듯 강렬한 맛이 있다. 또 그 강렬함 만큼이나 한 순
간에 훨훨 타오르고 미련 없이 훌훌 낙엽져 간다. 그래서 그 정염의 극치
를 만나보려면 미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올해는 가을비가 적절히 내려 날씨만 순조로우면 단풍도 예년보다 화려할
것 같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단풍의 명소 중 마음에 정한 곳이 있으면,
그곳 날씨 변화를 물어보아 적기에 맞춰 떠나야 한다. 그런 기다림 끝에
마주하는 아름다움이야말로 몇배나 더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용문산 용문사
--황금빛으로 물든 1천년 은행나무 거목
(사진/용문사를 감싸고 있는 빨간 단풍숲 절 앞의 1천년 고목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용문산은 경기 제일의 명산으로 꼽힌다. 1천m가 넘는 가파른 산세와 기암 으로 장식된 위용이 일품이다. 짙은 수림과 맑은 계곡, 천년의 내력을 지 닌 용문사와 은행나무 고목, 공원의 각종 편의시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
가을 용문산의 진경은 용문사로 오르는 계곡의 관목숲과 절을 에두르고 있는 단풍, 그리고 동양 최고 최대의 1천년 은행나무가 하나로 어우러지 는 장면이다.
계곡의 단풍은 용문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절까지 20∼30 분 거리의 짙은 숲길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빼곡한 관목들은 제각기 노랗거나 빨간 색상을 뿜어내며 가을빛으로 물든다. 사이사이로 아름드리 노송들까지 곁들여 생기가 넘쳐난다.
절이 올려다보이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하늘이 시원하게 열린다. 절을 가 리고 우뚝 솟은 은행나무는 높이가 60여m, 둘레가 10m나 된다. 천연기념 물 제30호이기도 한 이 거목은 지금도 20여 가마나 되는 은행을 수확할 정도로 ‘정정함’을 뽐낸다. 특히 노란 잎새로 감싸인 거대한 자태는 바 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사방으로 올려다보이는 갈색 물결과 절을 감싼 붉은 단풍, 절 마당을 굽어보는 은행나무 등이 가을 산사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이끈다. 용문산 단풍은 보통 10월 중순이면 제맛이 난다. 은행나무의 단 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정확한 시기를 알고자 한다면 용문산 공원관 리사무소(0338-73-0088)에 문의하면 된다.
길과 먹거리
가는 길은 팔당댐에서 양수리를 거쳐 양평으로 오르는 것이 정석이다. 하 지만 아직 양수리를 지나는 체증이 해결되지 않고 있어 우회도로를 이용 하는 게 좋다. 그 첫번째는 중부고속도로 광주 인터체인지에서 퇴촌과 남 한강변을 거쳐 양평교를 건너는 길이고, 다음은 곤지암사거리 주유소 앞 에서 양평교로 이어주는 329번 도로를 타고 양평으로 접근하는 길이다. 이때 길의 중간쯤 상품리에서 호실재를 넘어 이포대교로 빠져 지평으로 돌아 들어가면 길은 더욱 한적하다.
용문산의 별미로는 주차장 맨 위쪽, 매표소 앞에 있는 용문식당(0338-73- 3434)의 산채정식를 권할 만하고, 주차장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간이 토산 물장도 들러볼 만하다.
봉화 청량산
--암벽층마다 환상적인 단풍 물결
(사진/바위색과 조화를 이루는 청량산 단풍.)
경북 봉화군의 청량산은 예로부터 은둔자의 산으로 이름 있다. 교통이 발 달된 요즘도 서울에서 6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지리적 조건 덕으로 아직 은 깊고 맑은 기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선인들이 수도와 정진의 장으 로 찾아들었던 곳임을 실감케 한다.
신라 명필 김생은 일찍이 이곳에 들어와 그의 필법을 완성해냈고, 그가 머물던 굴이 지금도 전해온다. 또 당대 문장가로 손꼽히던 최치원도 이곳 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황은 청량산을 유난히도 좋아해 스스로 청량산인이라 칭하고 <청량산가>를 지어 부르기까지 했다 고 한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바위산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둘러서 산군을 이루었 고, 봉우리마다 떡시루를 엎어놓은 듯 바위층이 차곡차곡 쌓인 모습이 신 비함을 자아낸다. 그 바위층 사이로 우거진 수림이 띠를 두르고 있고, 이 숲들이 차례로 물들어 내려오는 모습이 청량산의 진경으로 꼽힌다. 그래 서 청량산의 추색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산의 중심에 앉아 있는 청량사에 묵으며 밤낮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이곳 주지스님의 말이다. 바위층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다양한 단풍색과 둥실하게 밝은 달이 이봉 저봉으로 옮 겨가며 바위산과 어우러지는 모습들은 선계에서나 볼 수 있는 비경이다. 청량산 단풍은 10월 중순에 절정을 이룬다. 청량사 전화는 0573-72-1446 이다.
길과 먹거리
청량산은 가는 길마저 가을의 여정을 만끽할 수 있는 각별한 맛으로 넘친 다. 서울에서 제천과 단양을 거쳐 가면 죽령고개를 넘는데, 소백산 산자 락을 굽이도는 고갯길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낙엽송 군락과 겹겹이 포개 지는 산그림자들이 일품이다. 고갯길에는 빨갛게 익은 죽령사과가 수북이 쌓여 계절감을 부추긴다.
봉화를 지나 청량산으로 접어들면 긴 협곡을 따라 흐르는 낙동강 줄기와 물 속에 드리운 바위산의 가을빛 또한 절경이다.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 과 하회마을을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도 또다른 가을 정취를 맛볼 수 있다 . 갔던 길로 되돌아오며 풍기의 부석사 한곳쯤 더 들러보아도 금상첨화다 . 부석사 단풍도 이때쯤이면 절정을 이룬다.
풍기읍의 유명한 서부냉면옥(0572-636-2457)은 평양냉면과 한우불고기로 이름나 있고, 봉화읍에는 봉화식육식당(0573-73-4343) 역시 불고깃집으로 한우만을 취급한다. 민박집으로는 이희조씨 댁(0573-72-1488)이 권할 만 하다.
화왕산 정상
--눈부신 하얀 억새꽃 만발
(사진/억새꽃이 지천에 널린 화왕산 정상.)
경남 창령읍에서 올려다보이는 화왕산 정상에는 색다른 가을 풍경이 펼쳐 진다. 붉은 단풍 대신 하얀 억새꽃이 지천으로 깔려 나부끼는 진풍경을 이루는 것이다. 억새꽃으로 이름난 가을 명소는 이곳말고도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정상 능선길 등 몇곳이 더 있기는 하다. 하지만 화왕산 정상은 지 형이 마치 화산의 분화구처럼 둥근 분지를 이루며 그 안에 나무 한 포기 없이 하얀 억새로만 가득해 눈맛이 더욱 진하다.
이곳 억새밭은 몇해 전부터 1년에 한번 불을 놓아 태워주기까지 해 더욱 실하고 무성하다. 잘 가꾸어 놓은 억새밭이나 다름없다. 또 산정에는 아 직 옛 성책의 일부가 남아 있고, 성 안에는 창령 조씨의 득성비(得姓碑) 와 연못자리 등이 전해 내려와 볼거리를 더해준다.
이곳 비경은 이미 널리 알려져 매년 억새꽃이 피어나는 9월 중순부터 10 월 초까지는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창령 시가지에서 주말에는 방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억새밭을 찾은 관광객들이 주말 저녁에 도착해 아침 일찍 산에 올라 억새밭을 구경한 뒤 귀로에 오르기 때문이다. 마치 설화가 핀 듯 하얀 억새밭은 허리를 넘기 보통이고, 때로는 키가 잠길 만큼 무성한 곳도 있어 억새밭 나들이로 나무랄 데가 없다.
가는 길과 먹거리
화왕산은 대구에서 가깝다. 영남 남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경부고속도로 금 호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로 옮겨타고, 구마고속도로로 들어서야 한다. 그 래서 호남에서도 88도로를 타면 쉽게 연결된다.
일단 창령이나 현풍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창령 시가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시가지에 들어서서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화왕산 오 르는 길이 훤하다. 일찍 오를수록 등산로 입구와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다.
현풍에는 이름 그대로 ‘현풍 박소선할매 설렁탕’ 본점이 있다. 워낙 오 랜 내력과 전국에 체인점을 두고 있는 곳이어서 한번쯤 그 본점의 맛을 확인해볼 만하다. 창령군청 관광개발과(0559-30-8224).
구리시 동구릉
--낙엽 밟으며 명당의 절경 만끽
(사진/황금잔디로 물든 능묘와 낙엽이 곱게 깔린 숲길.)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은 조선왕조의 능묘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으 로, 마치 경주의 대능원을 방불케 하는 능역이다. 조선왕조 초기부터 잘 관리해온 곳이어서 수림은 물론 능묘들이 옛 그대로 보존돼 있다. 특히 가을에 이곳을 찾으면 절경이 따로 없음을 느끼게 된다.
이곳은 원릉인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해 현릉과 목릉 등 여덟개의 능과 한 개의 묘가 있고, 합장된 왕비까지 포함하면 모두 18위가 모셔져 있다. 이 들이 들어 있는 능역의 규모가 무려 59만2천평에 이르고, 현재 공개되고 있는 여섯 능역만도 10만여평에 이른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가깝고, 한국제일의 명당을 자랑할 만큼 숲의 경관도 빼어나다. 황금잔디로 물들여진 부드러운 곡선과 화사한 단풍, 푹신하게 깔린 낙엽의 어우러짐은 가히 비경에 가깝다. 특히 주말을 피해 한적한 이른 아침 이곳 숲속에 들어서서 지는 낙엽을 밟는 맛이란 이루 형언하기 힘들다.
동구릉 단풍은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그 특징을 조금씩 달리하며 비교적 길게 이어진다. 처음은 화사한 단풍의 밝고 현란함이 있고, 차츰 낙엽이 깔리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어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질 무렵이 면 짙은 갈색으로 바탕색을 이루며 우수에 가까운 깊은 경지로 다가온다. 도심에서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깃들여 있는 것이다.
가는 길과 먹거리
동구릉 가는 길은 매우 쉽다. 강북에서는 망우고개를 넘는 것이 정석이고 , 강남에서는 88도로를 타고 강동대교를 건너 구리시를 우회하여 퇴계원 으로 빠지는 육교에 올라서 구리인터체인지를 나서면 곧바로 동구릉 주차 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강동대교에서 주차장까지 3.5km에 불과해 서울에 서는 어디서나 1시간대다. 동구릉 주차장은 무료다.
주차장 옆에 자리잡고 있는 산장가든(0346-63-6208)은 냉면과 불고기로 1 0여년의 내력을 지닌 이름난 집이다. 능 주변의 먹골배도 이때쯤이면 제 맛을 낸다. 동구릉 관리사무소(0346-63-2909).
김순경/ 여행칼럼니스트
© 한겨레신문사 1997년10월02일 제 1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