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고실업 시대, 대책이 없다.

(사진/앞으로 8천여명을 감원할 계획인 기아자동차 공장. 대기업들의 대대적인 감원계획으로 고용불안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실업은 당사자의 생활수단을 빼앗는 데 그치지 않고 자존심마저 박탈한 다. 사람들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확인하기 때문이 다.” 카이사르의 말이다.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데도 일자리를 갖지 못한, 한마디로 ‘잉여인간’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의 존재는 “철저한 복 지정책이 있든 없든 사회 불안의 온상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오늘날 실업자 1만명은 1개 사단 병력의 파괴력과 맞먹을 정도로 사회불안을 부 른다는 말조차 나온다. 그동안 고도성장을 거듭하면서 인력부족을 호소하 는 데만 익숙해 있던 우리 경제가 마침내 ‘고실업’이라는 암초를 만났 다.

임시직·일용직 폭발적 증가

물론 통계수치만으로 보면 현재의 실업률은 아직까지 크게 우려할 만한 정도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최근 노동부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실 업률은 7월 말 현재 2.2%다. 지난 3월 무려 72만4천여명(실업률 3.4%)에 이르던 실업자수도 47만6천명 수준까지 크게 줄었다(표 참조). 이같은 수 치는 명예퇴직 바람이 처음 불어닥치던 지난해 가을의 실업률 1.8∼1.9% 대와 비교하면 높기는 하지만, 지난 3월 이후 고용사정이 비교적 안정돼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통계수치의 흐름과는 반대로 오히려 ‘실 업공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지표실업과 체감실업의 격차는 우선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노동자수의 증 가에서 확인된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매월 3천명 안 팎이던 실업급여 신청자수가 6월과 7월에는 5천명을 넘어섰고, 8월에도 4 천2백여명에 달했다. 급여신청 안내문을 집중적으로 내보내면서 6·7월에 신청자가 몰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 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실업률이 낮아진 것은 취업전선에 나섰던 사람 들이 구직이 어렵게 되자 취업을 포기한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민간경제연구소들은 사실상 실업자이면서도 경제활동인구에서 빠져있는 잠재적 실업자까지를 합하면 전체 실업자수는 1백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현대경제사회연구원(홍성민 주임연구원)이 지난 92년 실업률이 2.6%였을 당시 “취업의사는 있지만 취업이 어려울 것같아 구직을 포기하고 있는” 실망노동자를 포함한 실업률을 조사한 결과, 실 업률이 무려 9.6%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률 수치가 실업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 들어 고용이 불안정한 임시직과 일용직 노동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6백70만명이던 임시· 일용직 노동자수는 올해 2/4분기에 7백23만5천명으로 6개월 만에 50만명 이 늘어났다. 전체 노동자의 무려 45%가 언제라도 해고를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표2 참조).

실업자 재취업도 훨씬 어려워져

실업자들의 재취업도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7월중 전국 노동관서와 시·군·구 취업담당 부서에 구직신청을 낸 사람은 지난해보 다 무려 111%가 늘어난 1만4천5백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구인자수는 겨우 6% 늘어난 1만3천7백85명에 불과해, 지난 92년 이후 처음으로 구인자수가 구직자수를 밑돌았다. 지난해 7월부터 지금까지 노동부에서 실업급여수당 을 받은 3만9천1백여명 가운데 재취업한 실업자도 전체의 16%에 불과한 6 천3백여명이다.

그러나 고용불안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 앞길은 더욱 캄캄하기만 하다. 노동시장에 새롭게 뛰어드는 이들은 많으나 일자리가 없다. 올해 취업시 장에 나올 대졸자와 취업재수생 30여만명 가운데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10만명에도 못미칠 전망이다. 가뜩이나 고학력자 실업률 이 높은 가운데 나머지가 실업자로 될 경우 사회불안을 부를 것임은 불보 듯 뻔하다. 올해 2/4분기의 대졸 20∼24세의 실업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 의 7.7%보다 높은 9.6%를 기록했다. 고학력 신규실업자의 증가는 이미 휴 학생의 급격한 증가를 비롯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의 해고·감원도 계속될 전망이다.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되고 있는 기아그룹이 올 연말까지 8천명을 감원할 계획이고, 의료보험 연합회가 2 천2백명을 줄이기로 하는 등 대기업들이 속속 감원에 나서고 있다. ‘철 밥그릇’이라 불리던 금융권에서도 감원바람이 세차다. 제일은행은 99년 까지 모두 1천1백명을 감원할 예정이고, 외환은행도 현재 8천3백여명의 인원을 99년 말까지 7천5백명으로 줄일 방침이다.

민간경제연구소들은 이에 따라 내년에도 실업률이 올해에 버금가거나 더 욱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내년도 우리나라의 실업 률은 올해의 2.8%보다 높은 3.2%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LG경제연구 원은 2.6%,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2.5∼2.6%, 한국개발연구원도 2.5∼3% 로 각각 전망했다. 그러나 고용시장의 구조변화로 인해, 고용불안은 실업 률 수치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데 민간경제연구소의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

정리해고 빨리 실시하자?

문제는 실업대책이 현실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부는 내년부 터 고용보험제도를 10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하기로 했지만 아직까지는 겨우 생색을 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실업자들의 구직을 위한 취업정보망 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고용관련 기관은 노동부 산하 46개 지방 관서의 직업안정과, 인력은행 3개, 고급인력정보센터 1개 등이고 나머지 는 민간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기껏해야 직업정보의 제공수준에 머물고 있 을 뿐, 적극적인 직업알선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그동안 대량실업의 경험도 없고,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를 부른다는 인식도 적어 실업대책이 정부정책에서도 뒷전에 밀리고 있어 전국적인 고 용관련 인프라 구축조차 예산 지원이 안 되고 있다”고 말한다.

고학력과 저학력,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무직과 생산직간의 인력수급 불 균형이 심각하다는 점도 실업문제 해결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국가 전체 의 인력수급 정책이 교육부 따로 통산부, 노동부 따로라는 비판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대학의 정원조정 문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 가운데 의미있는 것으로는, 섬유업종 등 최 근 1년간 근로자수가 10% 이상 감소한 업종들을 가려내 고용조정 지원업 종으로 지정해 지원하기로 한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 다.

정부는 지난해 노동법 개정을 시작하면서 크게 두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노사자율교섭체제를 정비한다는 것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둘 가운데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이 강 화되면 그만큼 일자리가 늘어 고용이 안정된다는 것이다. 대량해고는 오 히려 임금수준의 전반적 하향평준화와 함께 생산성을 향상하고, 인력의 효율적 재배치를 자연스럽게 달성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전경련은 특히 기업들이 20∼30%의 잉여인력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해고가 어려워 구조 조정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며 정리해고제의 조기실시 필요성 을 주장한다. 재경원이 최근 확정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21세기 국가과 제’ 가운데 노동시장 유연화 방안은 기본적으로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두 고 있다. 재경원은 우선 연초 노동법 개정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반발로 무산됐던 근로자파견제를 올해 안으로 법제화할 방침이다. 그러나 노동계 의 반발은 예상 밖으로 강력하다. 실업대란이 본격화하리라는 우려 때문 이다.

제2의 총파업 오는가

민주노총은 무엇보다도 기아사태의 해법에서처럼 부도유예협약 적용 때 노조의 감원동의서를 받도록 하려는 것은 정리해고를 기정사실화하는 것 이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파견근로제도 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조건 이 열악한 비정규직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윤우현 민주노총 기획부국장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재벌/하청 경제로 수직계열화돼 있어 과잉 중복투자된 인력을 임금 및 근로조건이 열악한 중소기업으로 재배치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지금으로서는 고용을 보호하면서 신규고 용창출의 공간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경제를 살려 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기업부실화 요인이 고임금에 있다기보다는 금융비용부담 등 생산외적인 요소의 비중이 큰 만큼 대량해고를 통해 문 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결국 실패를 자초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노 총 김종각 연구위원도 “파견근로제 도입은 핵심근로자와, 근로기준법이 나 노조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주변근로자 사이의 격차만을 늘려, 결과적으로 낙후한 부분이 핵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 시했다. 노동계에서는 이에 따라 해고보다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이 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른바 잡쉐어링(Job S haring)이다.

현재로선 정부의 정책방향이 정부가 낙관하는 대로 장기적으로 경제회생 과 함께 실업문제를 해결해줄 것인지에 대한 예단은 섣부르다. 그러나 당 분간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더욱 가속화할 것만은 분명하다. 민주노총은 ‘고용안정과 경제민주화의 실현’을 하반기 과제로 설정해, 총파업을 포 함한 총력투쟁을 선포하고 나선 상태다. 자칫하면 제2의 총파업 사태를 부를 것이라는 우려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회생을 강조하는 대 통령 후보들조차도 짙어가는 고실업의 우려에 대해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 고 있는 형편이다. 정남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