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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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항상 한국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신 적이 많았어요. 처음 밟 는 땅이지만 아버지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조국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 해지는군요.”
한글 이름 임은희(59·가운데)씨. 스페인식 이름은 ‘마르타 임 김’이다 .성이 두개인 것은 부모의 성을 모두 따른 때문이다. 한국생활체육협의회 가 해마다 여는 ‘세계한민족축전’에 그는 네명의 쿠바거주 동포들과 처 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데이비드 리 장, 사바나 박 리, 플라시도 리 오 , 미구엘 가비노 김(왼쪽부터)씨는 비록 우리말은 못하지만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지난 9월6일 아버지 임천택 선생 12주기를 맞은 임씨는 아버지를 대신해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의 부 친이 벌인 독립운동 공적이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1905년 1월30일, 겨우 두살이던 아버지는 홀어머니 품에 안겨 1천33명 의 조선 이주민과 함께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첫발을 내디뎠죠. 나라가 어 려운 때였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서 고통스런 날을 보내던 조선 이주민 가운데 임씨 의 부친을 포함해 3백여명이 1921년 다시 카리브의 섬나라 쿠바로 이주해 갔다. 그때부터 삼대에 걸친 쿠바 이민사가 시작되었다. 고단한 노동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어려운 나날 속에서도 임씨의 부친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 쿠바 한인지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지원했 으며, 1938년에는 한인여성협회를 만들어 여성의 권리 신장에도 선구적 구실을 했다.
“아버지는 혼자서 한국어를 공부하셨어요. 저희 아홉남매를 먹여 살리느 라 새벽별을 보고 나가 달밤에 들어오시는 일이 많았는데 한마디라도 저 희에게 한국말로 하시려 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임씨 남매는 모두 대학교육을 마쳤다. 임씨는 고향에 있는 마탄사스대학 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년 전 퇴임한 뒤 역사학자인 남편 라울 루 이스와 함께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그는 아버지처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쿠바에서 태어나 쿠바혁명 등 격동의 현대사를 몸으로 겪었으며 현 지 남성과 결혼했다. 더구나 한국과는 외교관계가 없었으니 다른 나라 교 민사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한국은 머나먼 땅이었다.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는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셨 지요.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서로 총을 겨누냐고 하셨지요. 그때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소원처럼 조국이 평화스러운 하나의 나라가 됐으면 합니다. 저는 쿠바 사 람이지만 이제 조국은 이 땅이라고 느끼거든요.”
임씨는 부친이 1950년대까지만 기록해놓은 쿠바 한인이민사를 현재 시점 까지 연장해 내년쯤 책으로 낼 계획이다. 흩어져 있는 쿠바 내 한인 2, 3 세들을 묶어 세우는 일도 계획하고 있는 그는 특히 “멕시코에서 쿠바로 재이주한 세대 가운데 아직도 생존해 있는 8명이 고국땅을 밟아볼 수 있 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다 쓸쓸히 숨져갔을 한 한국인의 음성이 쿠 바사람 마르타를 통해 조용히 흘러나왔다.
김상준/ 자유기고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