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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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영화를 보는 건 오랜 습관. 차례를 지낸 뒤, 마땅히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은 사촌들끼리, 또는 연인들끼리 영화관으로 몰려갔다. 60년대 신성일부터 80년대 초반 성룡에 이르기까지 추석 영화보기는 누구에게나 하나의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비디오와 다양한 레저문화의 보급 등으로 과거와 달리 추석날 영화보기는 이제 조금 촌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추석은 영화판에선 연말과 함께 양대 대목의 하나다. 올해 추석 극장가는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와의 한판 승부다. 극장으로 가는 길 은 여전히 즐겁다. 영화를 고르고, 굳이 연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약 속을 하고, 햄버거집에서 만나 표를 끊고, 복도에서 즐겁게 기다리고, 예 고편을 보며 팝콘에 콜라를 홀짝이는 것까지 똑같은 극장의 추억은 아무 리 반복되어도 늘 즐겁다.
멜로
<접속>
추석 땐 여름이나 연말과는 달리 한국영화가 빛을 발하는 때다. 가을의 초입이라 멜랑콜리한 영화가 더욱 발길을 끈다.
라디오 PD인 동현과 케이블TV 홈쇼핑 가이드인 수현은 통신을 통해 우연 히 접속한 뒤, 사랑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조금씩 다가간다. 도시적 우수와 상실감이 영화의 매력. 한석규와 전도연 의 절제된 연기는 영화에 윤기를 더했고, 무엇보다 이 시대 젊은이의 사 고와 행동방식을 알뜰하게 표현해내는 감독의 연출력은 첫손에 꼽힌다. < 오!꿈의 나라>를 만든 장산곶매 출신의 장윤현 감독은 절대가치가 붕괴된 이 사회에서 개인에 주목했다.
한편 이 영화에서 음악은 몸이다. 극 흐름에 주요한 위치로 등장하는 벨
벳언더그라운드의
<창>
“누구나 가 보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는 광고카피, 신은경의 젖
가슴을 드러내보이는 샛노란 홍보가 사람들을 신새벽 열혈남아로 만든다.
그러나 감독이 임권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창>이 살색 가득한 화면과
창녀의 뻔한 넋두리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70
∼90년대까지의 힘겨웠던 우리 현대사를 창녀촌 위에 얹어놓지만 <영자의
전성시대>류도 아니다. 사회상은 영화의 바닥에 깔아둘 뿐 관객 눈앞으로
팍 들이미는 생경하고, 폭력적인 방법을 쓰진 않는다.
술 파는 곳인 줄 알고 보따리 이고온 시골뜨기 소녀 영은은 불어터진 라
면을 먹고, ‘길들여짐’을 당한 뒤 몸파는 여자가 된다. 그때 나이 열입
곱. 곰팡내 나는 닭장 같은 쪽방에서 철공소 직원 길룡을 만나 고향을 꿈
꾸기도 하는 창녀 영은의 가슴 한쪽에 메밀꽃 기억은 남아 있다. 영은은
세월 따라 광주, 탄광촌, 유흥가로 돌고돌다 퇴기가 되어 서울에서 다시
길룡을 만난다. 서로는 서로에게 잊었던 고향이었던가보다. 70년대 우리
어머니, 누나들이라면 눈물, 콧물깨나 쏟았겠다. 90년대의 감각이 덧입혀
진 <창>은 신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한국적인 영화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
타미 감독.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지난 8월15일 개봉, 한달이 다 됐는
데 이번 추석을 관통할 작정이다. 그의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부부로 나오는 호세인과 테헤라의 이야기다. 호세인은 촬영을 하면서 끊
임없이 테헤라에게 구혼한다. 테헤라는 그의 구혼을 거절하고, 영화 속
영화는 계속되고.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또 ‘희망’이 무엇인
지를 묵시적으로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선 <내 친구의…> 속 아
마드의 고운 마음처럼 따스함이 느껴진다. 화면 가득한 올리브 나무는 너
무 아름다워 스크린 밖으로 향기마저 뿜어나올 것만 같다. 가을느낌 영화
.
<에어 포스 원>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액션영화”라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만에 찾은 영
화관에서 촉촉한 감상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만, 괜한 똥폼 잡기보단 그저
와장창창 치고박고, 때려부수는 영화가 최고일 때도 있다. <에어 포스 원
>은 이런 생각으로 영화관을 찾는 이들에겐 최고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탄 전용기 ‘에어 포스 원’이 공중납치된다. 테러리스트 집단의 요구는
억류중인 러시아 독재자의 석방. 히치하이커와 영웅의 대결은 할리우드
영화에선 너무 많이 우려먹은 소재다. 하지만 ‘에어 포스 원’에선 비행
중인 항공기에 사람이 매달렸다가 떨어지고, 서서히 추락하는 항공기와
그 옆에서 편대비행하는 항공기 사이에 로프를 연결해 인질을 구출하는
등 한 장면, 한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어차피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더 믿기 어려운 건 와이셔츠에 핏빛 얼룩을 흘려대며,
인질과 맞서는 영웅이 대통령이라는 점. 지난해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람보의 직업은 귀향군인에서 대통령으로 급상승하는 게 요즘 추센가보다.
미국 패권주의, 제3세계 멸시, 인종적 우월주의 등을 주워섬기며 게거품
을 물진 말자. 어차피 미국영화인데. 액션영화 보다가 쓸데없는 일로 열
받으면 나만 손해다.
<더블 팀>
홍콩과 함께 홍콩영화도 함께 사라졌지만, 홍콩영화는 마치 ‘에이리언’
처럼 할리우드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오우삼의 <페이스 오프>에 이어 서
극 감독도 할리우드 입성작으로 <더블 팀>을 내놓았다. 은퇴한 전직 CIA
요원인 잭 퀸(장 클로드 반담)이 아내와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임무가 주어진다. 국제적인 테러리스트인 스타브로(미키 루크)를 체포하
는 것. 작전에 실패한 퀸은 콜로니섬에 갇힌다. 퀸은 아내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2m에 달하는 거구 무기전문가 야즈(데니스 로드먼)와
함께 섬을 탈출한다. 하늘과 바다와 땅을 넘나들고 급기야는 호랑이와 맨
손으로 싸우기도 하는 장 클로드 반담, NBA스타 데니스 로드먼의 천방지
축 더블 액션이 볼 만하다. <영웅본색> <천녀유혼> <황비홍> <동방불패>
가 더 그립긴 하지만.
<페이스 오프>
할리우드판 <첩혈쌍웅>. 비평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영화로 개
봉 한달이 넘었지만(8월9일 개봉)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슬로모션,
고독한 영웅, 킬러, 선혈 낭자한 폭력에 감상주의 등 오우삼표 액션은 여
전하다. 여기에 비행기와 헬기를 동원한 일대격전, 서로의 얼굴을 바꾸어
서로의 삶에 침투하고, 서로가 자신의 얼굴을 노리는 기상천외함이 덧붙
여진다. 자아의 정체성을 상실한 세기말 우리 모습이 홍콩출신 할리우드
혼혈영화 속에 거울처럼 비쳐진다.
<블랙잭>
액션보다 더 가슴을 조이는 게 스릴러물이다. 올 추석에는 스릴러물이 유
난히 많이 띈다. 우리네 삶이 점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투와 음
모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건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정지영 감독의 신작 <블랙
잭>은 결말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의 연속이다. 경찰 신분을 이용해
범죄와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잔인하고 비열한 사내, 오세근(최민수)은
비열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혼한 아내가 데리고 있는 아들 민석이와
언젠가 함께 사는 것이 꿈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늘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는 우연히 신비로운 여인, 장은영(강수연)을 만나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불태운다. 그러나 장은영의 속셈은 권투 프로모터인 남편을 없애
는 데 오세근을 이용하려는 것. 이때부터 포카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는 먹
고 먹히는 도박게임이 벌어진다. 여기에 격투, 덤프트럭 레이스, 베드신
등 다양한 볼거리가 풍성해 릴타임이 2시간에 이른다. 강수연의 복합 캐
릭터가 영화를 더욱 흥미롭게 한다.
<마리아와 여인숙>
서해안 안면도 끝자락 여인숙 하나. 조금 모자란 형(김상중), 어린시절
불우한 가정사로 정신적 불구가 된 동생(신현준), 여기에 남편에게 버림
받고 7세된 딸 마리아(이정현)를 데리고 온 창녀출신 명자(심혜진). 장급
여관도 아닌 시골 여인숙을 뺏으려는 쫀쫀한(?) 명자의 음모는 간음, 자
살유도 등 두 형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여기에 명자의 남편
태수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반전된다. 그리고 어느새 마리아는 제2의 명자
가 되어 있다. 형수와 시동생의 불륜, 두 의붓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적
애정표현은 영화에 긴장도를 불어넣는 중요 요소이면서 또하나의 메시지
이기도 하다.
<컨스피러시>
CIA같은 국가 핵심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을 희생양으
로 삼는다는, 소름끼치는 설정. 제리 플리쳐(멜 깁슨)는 뉴욕의 택시운전
사. 재미삼아 손님들에게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주워모은 다양한 음모들을
들려준다. 그가 집착하는 또다른 대상은 법무성 소속 변호사 앨리스 수튼
(줄리아 로버츠). 일을 마치고 창 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 그의 낙이다. 어느날 플리쳐는 대통령 암살 음모를 발견하고 앨리스
를 찾아가 이를 전한다. 그뒤 그는 납치된다. 두명의 톱스타가 등장하는
이 영화는 스릴러 요소를 여러 곳에 깔고 있지만, 논리의 비약과 방황이
너무 심해 어지럼증을 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CIA는 대통령 암살음모를 꾸미고, 이를 아는 시민을
살해하려하고, 일반시민을 골라 킬러로 만드는 등 악의 화신처럼 등장한
다. 우리도 이처럼 안기부를 소재로 하는, 그것도 이 영화에서처럼 사실
보다 과장된 악역을 맡길 수 있을까? 아니 있었던 사실의 1백분의 1이라
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브레이크 다운>
제프(커트 러셀)와 에이미(캐슬린 퀸란)는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부부.
샌디에이고로 이사하던 도중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에이미는 납
치당한다. 미국인들의 이데올로기인 중산층 가정의 행복을 무참하게 깨는
집단적 광기가 번득인다. 영화는 촘촘히 깔아놓은 복선을 차근차근 절정
으로 몰아감으로써 기막힌 서스펜스를 자아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한다. 저명 감독이나 눈에 띄는 스타배우 없이도 미국 개봉 당시 박스오
피스 1위를 차지한 것도 이런 스릴러 장르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덕
분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설정이 위기감을 더한
다.
<현상수배>
감동도 중요하지만, 영화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재미 지상주의’가
영화판을 장악한 건 꽤됐다. 그리고 그 ‘재미니즘’의 가장 확실한 레닌
은 박중훈이다. 박중훈 영화는 이제 최소한 한 가지는 보장한다. 웃긴다
는 것.
박중훈은 <현상수배>에서 자기복제(1인2역)로 재미의 증폭을 시도한다. <
현상수배>는 스타를 꿈꾸며 호주로 온 제이(박중훈)가 갱두목 써니(박중
훈)와 얼굴이 닮아 현상수배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코믹 갱스터 무비.
제이는 호주 시드니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있는 가난한 한국 유학생, 여자
밝히고 장난 좋아하고 연기에 재능은 별로 없는 전형적인 건달 박중훈 캐
릭터. 써니는 시드니 암흑가를 꽉 쥐고 있는 깡패인데, 인상 쓴 박중훈.
결국 판이하게 다른 두 박중훈은 결전의 날을 맞게 되는데. 얼마나 웃길
지는 두고볼 일.
시드니에서 현지 스탭과 배우를 대거 기용,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제작돼,
한국영화 최초로 직배가 되어 9월 한국과 호주에서 동시 개봉한다.
<할렐루야>
박중훈에 의한 박중훈을 위한 박중훈의 영화. 사기꾼 양덕건(박중훈)이
돈이 탐나 목사행세를 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이 배꼽을 잡는다. <돈가
방을 든 수녀>, <씨스터액트>의 포맷을 그대로 따온 듯한데 박중훈의 연
기는 우피 골드버그를 능가한다. 여기에 조연 최종원, 남포동, 카메오 이
휘재, 이재룡, 최지우, 박철, 도지원, 이혜영, 고소영 등 영화는 사람장
사로 본전을 빼려 한다. 박중훈을 제외한 극본, 기획, 감독의 직무유기가
조금 거슬리지만 어쨌든 웃겨준다. 8월9일 개봉 이후 한 달이 넘어 이제
대부분 간판을 내렸지만, 아직도 <할렐루야>를 볼 곳은 남아 있다.
<넘버.3>
<할렐루야>에 박중훈이 있다면 <넘버.3>에는 한석규. 여기에 3류 검사 최
민식, 3류 시인 박광정, 3류 마누라 이미연, 그외 다수의 3류 깡패들. 8
월2일 개봉됐지만, 아직도 관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넘버.3>는 웃긴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 우리 사회를 향해 내뱉는 풍자와 조롱이 통렬해 더
욱 시원∼하다. 여기에 스타의 원맨쇼와는 달리 배역 하나하나가 생명력
이 넘치고, 연기자들은 또 이를 훌륭히 소화해낸다.
<마이티 아프로디테>
뉴욕 맨해튼의 여피족인 레니(우디 앨런)는 아내의 권유로 사내아이를 입
양하고, 아이가 커가는 것을 보며 감탄한다. 그래서 생모를 찾기로 하는
데 생모는 창녀였다. 이에 레니는 자식을 위해 생모를 갱생의 길로 이끈
다. 끊임없이 주절대는 대사, 유혹에 약한 등장인물, 경쾌한 재즈음악 등
우디 앨런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지적인 코미디(다른 말론 썰렁한 코미디
)다. 생모는 나중에 정상적인 가정을 이룬 뒤, 우연히 레니와 그의 아이
를 만난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인지는 모른 채 가벼운 인사로 헤어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무엇을 뜻하는 걸까?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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