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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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론조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질문자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미래의 정치현상은 과연 예측가능한가.
여론조사는 불확실한 사회현상을 수치로 분석해 설명하는 장치다. 사회현 상에 자연과학의 객관성을 부여해 예측가능한 사회로 이끌기 위한 인간의 바람은 통계학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 하지만 여론조사는 제한 된 시간과 예산, 노력 등 현실적인 제약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과학 적인 엄밀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론조사는 경험과학 을 신봉하는 가운데 정치적 위력을 떨치고 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한다. 민주주의적 도덕률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여론은 국가운영의 절대적인 지표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민심 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도구가 여론조사라 할 수 있다. 여론조 사는 그 민심을 효율적으로 모아서 위정자와 대중에게 알리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민심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정치인에게 여론조사 는 신비한 마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가운데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고 있은 민심을 반영하기 위한 노 력의 하나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대선정국의 지형을 변화시킬 정도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정치인은 여론조사를 대권 출마의 발판으로 삼 으려 하기도 한다. 그만큼 여론조사에 막강한 정치적 힘과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객관적인 진실을 담은 사회적 합의인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오류는 조사·의뢰·응답자의 공동혐의
여론조사는 일반적으로 객관성을 유지한 중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론 조사는 마술적인 눈속임이 아니다. 여론조사는 경험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속임이 아니라고 해서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론조사의 생산자인 전문 조사기관이 개입할 여지가 곳곳에 있는 것이다. 일반인의 수준을 넘는 특별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조사기관은 여 론을 모으는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기도 한다. 계획한 답변 을 유도하는 설문 문항을 만들 수 있으며, 특정 사실을 과장해 발표함으 로써 대중을 오도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코리아리서치센터 이흥철 상무는 우리나라 조사업계의 척박한 현실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무조 건 싸고 빠른 조사를 필요로 하는 가운데 오차가 발생하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여론조사가 이뤄진다. 응답자와 답변자의 의사소통이 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여론조사도 많은 실정이다. 조사전문가가 확실하게 면접원을 통제하고 표본오차와 비표본오차를 줄이기 위해 패널을 구축해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현실이 조사자의 혐의를 벗겨주지는 않는다. 과학적 방법론이 여론 조사 과정에서 완전무결을 보장하리라는 기대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여론 조사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오류를 검증하기 위한 자율적인 심의기구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분석을 위해서는 원자료와 자료처리과정 의 공개는 필수적이다. 현재 실시되는 여론조사의 대부분은 언론 공개를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음에도 조사결과만 공개될 뿐, 조사의 신뢰도 향상 을 위해 필수적인 원자료와 자료처리과정은 은폐되고 있다. 언론에 공개 하는 조사결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풍부한 추가분석을 기대할 수 없다. 원자료와 처리과정이 공개되어 공식 심의기구에서 심층 적인 비평을 한다면 휠씬 신뢰도 높은 여론조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
여론조사 결과의 투명성은 일차적으로 조사기관이나 조사 연구원들이 앞 장서서 보장해야 한다. 하지만 조사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상황도 무 시할 수 없다. 조사의뢰인이나 조사의 수용자 모두 이에 대한 공범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어떤 특정집단이나 기관에 제한되지 않고 개방된다. 조사결과가 유리하게 나온 집단은 정치 형태를 변화시키며 대중을 설득하는 무기로 삼게 마련이다. 조사 결과는 대중의 의사를 반영한 ‘공공의 합의’라는 형태로 사회적 인식과 담론에 침투·확산되어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조사의뢰인은 그들의 입맛에 맛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골몰한다. 신속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선정적인 저 널리즘에 부합하는 조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과학적인 방법 론에 따른 정확한 조사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밖에 없다 .
선거판세를 분석하는 여론조사의 경우 조사기관에 따라 지지도가 많은 차 이가 발생한다. 특히 각 정당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경우가 그렇다. 언 론사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암묵적으로 선호하는 후보를 위해 전략적 인 설문을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가 선거의 당 락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앞서 가 는 사람을 계속 지지하려는 ‘밴드웨건효과’와 뒤지는 사람을 지지하겠 다는 ‘언더독효과’가 서로 맞서는 가운데 상대적 우위가 판명되지 않은 것이다. 선거 진영의 각 후보들이 우호적 유권자에게 적극적인 지지표시 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여론 조사 결과 지지도가 앞선다면 조직을 합리화하고 안정화하는 기반을 마련 하는 데 효과적일 것은 분명하다.
여론조사기관이 아무리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조사시기를 선택하고 표본 추출, 설문문항 등의 객관성을 담보했더라도 응답자(수용자)의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여론조사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응답자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 것이다. 지난 14대 총선에서 여론 조사 결과 경북과 충북지역에서 여당의 몰표가 예상되었지만 실제로는 정 반대였던 경우에서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당위론적인 응답이 적지 않 다는 얘기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신명순 교수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정 치환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아 직도 많은 피해의식이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의식조사가 자 유롭지 못했고 지금도 제한규정이 남아 있다. 정치적 의사표시를 솔직히 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또한 자신의 지역적 정서를 감추거나, 정당의 처지를 고려해 전략적 으로 응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론조사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한국적 정치현실이 극복되어야 한다.” 정치적 무관심 또한 여 론조사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구실을 한다. 전화면접의 경우 응답거절률 이 보통 30%를 넘는 수준이고 면접을 했더라도 특정 사안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20%를 오르내린다. 이런 가운데 여론조사에 나타난 숫자의 요술이 신통력을 발휘하기엔 역부족이다.
여론조작 막기 위해 여론비평 활성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는 경우에 따라 충격적으로 대중 앞에 설 것이다. 특유의 과학성을 내세우며 엄밀한 수치로 포장해 객관적으로 보 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과학으로 포장해 보이지 않는 통제의 힘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여론조사 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열려라 참깨’식의 주문이 아니라는 말 이다. 그래서 수용자는 설문조사 문항의 토씨 하나까지 꼼꼼히 읽어보며 숨은 진실을 찾아야 한다. 물론 그런 노력은 수용자만의 몫이 아니다. 여 론을 조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이 ‘여론비평’의 주체로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서로가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여론조 사는 또다른 여론조작의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김수병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