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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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풍요의 진정한 의미는 생산물을 나누는 데 있다. 식량이 부족한 가운데 발생한 기근과 질병은 다음 세대에 해악을 끼친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가 찾아왔다. 우리는 자신이 직접 거둔 것은 아닐지라도 풍성한 수확물들을 차려 놓고 봄여름 땀흘린 농민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생명과 이 풍요로움을 주신 조상의 음덕을 기린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산업사회에 접어든 지도 제법 되어 농업이 전체 생 산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예부터의 풍습은 어김없이 지켜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통적인 명절지키기 를 통해 우리 존재의 역사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이 풍성한 계절 에 자칫 잊기 쉬운 풍요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반론들이 있지만 현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울 뿐 아니라 인류가 대 체로 가장 건강한 삶을 누리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수명이나 질병 에 걸리는 이환율을 볼 때 그러하다. 그렇다고 현대가 이상적인 시대라거 나 인류사의 종착역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필자는 현대가 다른 시대보다 오히려 뒤떨어진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을 부정하지도 않 는다.
그러면 어떻게 현대사회에 들어 이환율과 사망율이 줄고 또 그 결과 수명 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을까? 인생칠십 고래희라는 두보의 곡강 시(曲江詩) 귀절이 무색할 정도로 노인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또 그저 수명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아지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흔히들 그것은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데 기인한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견해는 자신과 주변의 경험을 통해 진리로까지 자리잡 는다. 충수돌기염(맹장염)이 진행되어 복막염에 이르렀을 때 현대의학이 없다면 생명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또 심한 세균성 질환을 앓 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항생제의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암은 아직도 불치병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최근 들어 완치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밖에도 많은 의학적 방법이 인간의 질병을 예 방, 치료하고 노화를 지연시키고 있다. 이렇듯 의학이 개인과 인구집단의 건강 증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인류의 건강 개선과 수명 연장에 의학보다 훨씬 더 큰 공을 세운 것은 삶의 질의 향상이라는 사실이 의사학(醫史學)과 일 반 역사학의 연구로 밝혀졌다. 특히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영양상태가 나 아진 것이 으뜸가는 요인이었음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주 거환경과 의(衣)생활의 개선이 인류를 오늘날과 같이 건강하게 만든 것이 다.
채집과 수렵, 그리고 어로에 식생활을 의존하던 선사시대 인류의 수명은 기껏 15세 안팎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던 것이 인류가 순수한 자연생활에 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농사를 짓고 목축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서서 히 수명이 늘어나 로마 시대에는 대략 25세에 이르렀다. 그리고 18세기를 전후하여 유럽과 동아시아 등 선진지역(우리나라도 여기에 해당된다)에서 는 농업혁명기를 거치면서 평균수명이 35∼40세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이 농업혁명기 이전에는 인구가 오늘날의 지속적인 성장과는 달리 팽창과 축소를 거듭하였다.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풍년이 지속되는 동안은 인구가 늘어났다가 흉년이 거듭되면 다시 줄어드는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식량 이 없어 말 그대로 굶어 죽기도 했지만 기근에 동반한 질병, 특히 전염병 의 창궐이 대규모 사망과 인구 감소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기근으로 질 병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저항력과 면역기능이 떨어진 것이 일차적으로 작용했다면 식량을 찾아 인구가 대규모로 이동한 것이 전염병을 더욱 널 리 퍼뜨리는 구실을 하였다. 기근과 그로 인한 질병은 다음 시대를 짊어 질 어린이들에게 더욱 커다란 해악을 남겼다. 올해의 기근은 올해를 넘김 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후유증을 남긴다는 사실이 역사를 통해 거듭 확인돼 왔으며 그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다행히 인류는 탄생 이래 몇백만년 동안 지속된 기나긴 고통의 늪을 이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조상만이 아니라 인류의 공통 조상들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진보의 길을 개척해 왔기에 우리는 오늘의 풍요와 건강을 누리는 것이다. 풍요와 건강이 인류 공동의 소산인 만큼 그것을 모든 인류가 함께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과 학적이기도 하리라.
풍성한 식탁 앞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한가위를 맞을 우리의 반쪽을 생 각하며 나눔이라는 풍요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일만큼이나 소중한 것일 터이다.
황상익/ 서울의대 교수·의료사 및 의료윤리학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