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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실험은 정당한가

(사진/80년대 에이즈 환자들은 실험약물 복용을 위해 인체실험을 요구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열린 에이즈 사망자 추모대회 모습.)

인체실험은 의학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가.

인류를 병마에서 구원할 의학기술의 발전을 위해선 인체를 대상으로 한 의학실험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반면 인류역사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인체 실험은 종종 범죄자·정신질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실험대상으로 삼는 바 람에 잔혹한 인권침해의 결과를 초래해왔다. 이렇게 인체실험은 의학발전 과 인권보호 사이에선 ‘의학의 딜레마’로 여겨지고 있다.

올해는 의학기술의 인체실험과 관련해 ‘피실험자의 자발적 동의’ 원칙 을 처음으로 확립한 국제적 윤리강령이 만들어진 지 꼬박 50돌이 되는 해 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으로 불리는 최초의 의학 윤리강령은 2차대전 직후 인 47년 8월 전쟁범죄를 처분하는 국제군사재판이 열린 독일 서부의 뉘른 베르크에서 작성됐다. 히틀러 정권 아래 인체실험에 참여한 의학자 23명 에 대한 전범재판 과정에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의학 윤리의 시금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강령은 상징문구에 불과”

뉘른베르크 강령 50돌을 맞아 최근 의학계에선 다시금 인체실험의 딜레마 논의가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미 매사추세츠공대가 발간하는 기술비평지 <테크놀로지 리뷰>는 최근 클린턴 행정부의 인간방사능실험자문위원회 일 원으로 활동했던 조나단 모레노 교수의 글을 통해 현재 의학계가 직면한 인체실험과 인권보호의 문제를 지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자발적 동의의 원칙은 의학계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딜레마를 안겨 주고 있지만 뉘른베르크 강령의 정신은 앞으로도 의학계의 도덕적 참고자 료가 될 것”이라고 뉘른베르크 정신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했다.

인류를 경악시킨 인체실험의 역사는 주로 2차대전 중에 이뤄졌다. 민족우 월주의정책을 폈던 히틀러 정권은 강제수용소 안에 갇힌 유대인 등을 대 상으로 온갖 인체실험을 자행했다. 얼어붙은 북해로 낙하산 비상탈출을 하던 독일공군의 몸을 녹이는 효과적 치료법을 찾기 위해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를 냉동 환경에 몰아넣기도 했다. 실험 목적으로 아무것도 먹이지 않은 채 술만 마시게 하기도 했다. 3천여명을 대상으로 세균실험을 자행 한 일본제국주의 731부대도 반인권적인 인체실험의 대표사례로 꼽히고 있 다.

뉘른베르크 강령의 기본정신은 ‘피실험자의 자발적인 동의’에 있다. 피 실험자가 인체실험의 사실을 충분히 고지받은 뒤 동의 여부를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인체실험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10개 항목으로 이뤄진 강령은 “피실험자의 자발적 동의는 억압이나 강제, 잘못된 정보 제공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며 “인체실험은 사회 공익을 위한 것이어 야만 하며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물리적 또는 정신적 고통은 제거해야 한 다”고 밝히고 있다.


전범국가 외에도 비밀리에 진행

하지만 뉘른베르크 강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상징적 문구에 머물러왔다고 모레노 교수는 지적한다. 전범재판 이후에도 사실상의 인체실험은 미국 등 각 나라의 비밀기관은 물론, 대학연구소·병원응급실 등에서, 의사와 환자의 일상관계에서 알게 모르게 이뤄져왔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범국가 외 다른 나라에서도 인체실험이 비밀리에 진행되기도 했다는 사실은 의학 계에 새로운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전세계에 경종을 울린 대표적 사건은 미국의 비밀매독연구였다. 30년대부 터 70년대에 걸쳐 미 보건당국이 매독에 관한 인체실험을 비밀리에 벌여 왔던 일이 한 언론인의 집요한 취재에 의해 공개되자 극심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자발적 동의는 뉘른베르크 강령 이래 다시 한번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72년 미 연방정부는 이 사건의 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조사활동의 결과물은 81년부터 미 보건당 국의 규정으로 인정됐으며 91년부터는 인체실험과 관련한 모든 연방기관 에 확대 적용됐다.

하지만 인체실험의 딜레마는 좀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병원 응급실에 통상의 치료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응급환자가 실려왔다면 의사는 당연히 새로운 실험치료법과 실험장 비를 쓰고자 할 것이다. 이런 경우 환자는 대개 ‘자발적 동의’를 해줄 만한 의식이 없거나 친지들조차 현장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사 는 동의없이 인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행위를 할 수 있을까? 또다른 상황 도 있다. 어린이질병에 대한 의학실험을 위해선 어린이 대상의 인체실험 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동의를 해줄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동의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


에이즈 환자들 실험 참여 요구하기도

최근엔 환자 자신이 인체실험을 적극 요구하는 또다른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80년대 에이즈 환자들은 에이즈 치료를 위한 실험약물 ‘AZT’의 실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특정한 환자들은 약 물과 의학장비 개발과정에 자신들이 피실험자가 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 고 있다. 특히 임종 직전의 환자는 실험치료법의 실험대상이 되기를 적극 원하고 있다. 인권보호와 인체실험 사이에서 ‘균형’의 길을 찾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오철우 기자/ 한겨레 생활과학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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