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사람이야기

낙농의 꿈 꺾은 ‘놀이사랑’

“디스코를 모르는 시골 촌놈이 도시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었 다고나 할까요.”

낙농기술을 배우러 81년 이스라엘 집단농장인 키부츠에 갔을 때의 경험을 이종명(43)씨는 잊지 못한다. 휴식시간에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어 울려 즐기고 있던 ‘백가몬’이라는 놀이를 이씨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가몬은 우리나라의 전통놀이인 ‘쌍륙’과 똑같은 놀 이였다. 쌍륙은 15개의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대 로 판 위의 말을 옮겨 먼저 나가는 팀이 이기는 놀이이다. 그만큼 우리에 게 놀이문화가 없었음을 실감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낙농업자가 꿈이었던 이씨의 인생은 바뀌었다. 외국에서 지내는 동안 낙농업을 공부하면서도 수백종류의 외국놀이를 수집했다. 급 기야 90년 귀국해서는 해오던 공부를 그마두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워서 짬짬이 즐길 수 있는 놀이’를 본격적으로 연구·보급하기 시작했 다.

91년부터는 문화체육부에 만든 ‘놀이사랑 문화가족’이란 모임을 이끌었 다. 쌍륙, 두 가지 숫자가 새겨진 나뭇조각 24개를 규칙에 따라 숫자를 맞춰가는 ‘골패’, 시조의 초장·중장·종장이 각각 적힌 카드 48장으로 빠른 시간 안에 시조를 가장 많이 완성시키는 ‘가투카드’ 등 12가지 놀 이가 실린 <전통놀이 모음집>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스톱에 찌든 기성세대들의 호응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을 포기하는” 대신에 그는 현재 아이들을 대상으로 놀이문화를 보급하는 데 힘을 쏟는다. 이를 위해 95년 놀이기구를 연구·개발·보급하는 ‘놀이사랑’(02-554-8500)을 차려 연 구실장을 맡고 있다. 오는 12월에는 전국의 영·유아교육 담당자와 놀이 기구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놀이감 콘테스트’를 열 계 획이다.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는 나라 가운데 놀이기구 박물관이 없는 곳은 우 리나라밖에 없어요.” 아무리 작더라도 동서고금의 놀이감이 한자리에 모 인 박물관을 만드는 게 놀이꾼 이씨의 소망이다.

조준상 기자/ 한겨레 생활과학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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