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

나는 과연 가해자였나

지금의 나는 이혼녀다. 혼자 서 있는 여자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때 나 는 행복하다. 아마 내게 직장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생계수단이 막막했다 하더라도 나는 단호하게 헤어졌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아니 인간으로 살고 있는 한은 적어도 그런 형태로 살 수는 없었다.

결별을 입에 담고부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었는데, 헤어질 결 심을 하고 나자 그는 친권은 자기가 가지고 양육은 내게 넘겨주었다. 자 신에게는 권리가, 내게는 의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두 아이는 참으로 다 행스럽게 보기좋은 10대로 잘 커주었고 이런 아이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 럽다.

20대 초에 그를 만나 연애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꿈꾸던 사랑을 발견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혼은 생활이 아니던가. 돌이켜보면 그와 나의 생활은 겉으로 크게 삐걱거리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서서히 곪아갔던 것 같다. 그 원인을 들라면 흔히 하는 말로 성격차이, 너무 강한 개성, 너무 다른 환경, 그리고 술 등을 들어야 할 것이다. 만약 술이 없었다면 그와 나의 생활은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술은 그와 나의 마음 상태를 항상 적나라하게 폭로해주는 역할을 했고, 두 인간이 감정적으로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은 항상 대책없는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었다.

지금도 그 남자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자 기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비난했 다. 그의 말을 들으면 내가 항상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억울한 심사를 억 누를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해자는 바로 나야, 내 인생이 결딴 났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소위 대화라는 걸 하자고 마주 앉으면 언제나 결과는 술상이 뒤엎어지는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 다.

20대에 결혼해서 40대에 헤어졌지만 그리고 헤어진 지도 여러 해가 지났 지만 아직도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는 일은 싫다. 분명한 것은 그 남자와는 나는 더이상 공동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래서 헤어졌 다는 것이다.

이혼, 혼자 몸, 나는 평화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를 안다. 탈없이 저녁과 밤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전화도 하고 무사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안다.

그러나 이같은 평화, 이같은 자유로움을 찾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 한동안 내 마음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내 주변의 세상이 끊임없이 흔 들거리는 것 같은 상태가 한동안 계속됐다. 나 자신을 정리하기 위해 일 기라도 써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불가능했다. 그동안 소모적인 관계의 진창에 빠져 너무나 소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놓치고 말았구나 하는 스스 로에 대한 연민은 한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 인간이 그리 좋은 존재가 못 된다는 것, 인간 의 마음 밑바닥에는 지옥이 있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는 생각은 나를 비롯 한 모든 인간들을 얼마쯤 떨어진 거리에서 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중요한 깨달음인지도 모르겠다. 조화로운 인간관계는 얼마만큼은 체념에 서 나온다는 깨달음 말이다.

지난해 여름 친구들과 함께 어느 계곡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얕은 계곡 물을 건너다 이끼에 미끄러져 발이 풍덩 빠지면서 온몸이 물에 젖은 형국 이 되고 말았다. 그때 넘어지면서 두눈을 뜨고 맑은 물과 마주하는 상태 에 있게 되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물 속에 얼굴을 묻고 온몸이 물에 젖 은 그 짧은 사이 나는 지나온 내 인생을 보았다. 물 속을 훠얼훨 떠가는 나 자신이 보였다. 나는 떠나가는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꼈다. 한없는 측 은함을 느꼈다.

개울가 마른 바위에 앉아 나는 울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떨리는 턱을 가누며 입술을 악물고 울었다. 그것은 내 영혼의 씻김굿이었 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나 자 신에 대한 연민은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나를 씻겨 떠나 보냈으므로 그리고 그 뒷모습을 이제 나는 더이상 쫓아갈 필요가 없 었으므로.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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