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에서

한가위, 가난에 대한 묵상

정월 대보름 달집 태우며 한해 소망을 기원했던 게 엊그젠데 벌써 그 소 망을 결실해야 할 한가위다. 세월의 빠름은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더해지 는 삶의 무게에 내일은 아득하다.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꼭 가윗날만 같아라’라던 옛 사람의 바람은 오늘에 와서 더욱 절실하다. 거둘 것이 적으니 나눌 게 없고 나눌 게 없으니 마음은 비젖은 낙엽이다. 하루하루 부푸는 달이 지친 어깨를 무겁게 누를 뿐이다.

한가위는 안타깝게도 잇단 부도와 금융불안, 이로 인한 대량감원과 봉급 동결, 그리고 체임·체불 소식과 함께 다가왔다. 한 연구소의 조사에 따 르면 실직자수는 6월 말 현재 50여만명. 연말까지는 20만명이 더 직장을 잃을 것이라 한다. 가계를 책임지는 중년 실직자의 재취업률은 9% 정도에 그친다 하니 한숨소리가 장안에 흉흉하다. 자리에 붙어 있다한들 실직의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2명 가운데 1명은 ‘실직 걱정에 일손이 안 잡히고’ 대부분 불안, 기억력 감퇴, 울화 등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특히 10명 중 3명은 두통을 호소하거나 불면증세를 호소하는 등 질병으로 심화해가고 있다.

또 지난 8월 말까지 전국 1천2백41개 사업장 5만6천여명은 임금 상여금 퇴직금 등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의 2.4배다. 기아그룹의 종사자까지 합 치면 10만여명이 넘고 이들이 받지 못한 임금만 모두 4천억원에 이른다. 각 공단엔 조업단축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시장엔 날파리만 가득하다 한다 .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몰려오는가. 생필품값은 20% 정도나 치솟아 의 료보험료 등 각종 공공요금 인상과 함께 허기진 가계를 더욱 휘청이게 한 다.

그러나 …. 생뚱맞고 물정 모른다 해도 좋다. 지난 5일 당신의 하늘로 올 라간 테레사 수녀의 삶과 그가 선택한 가난, 그리고 그가 귀하게 여겼던 가정을 생각해보자.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 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당신은 당신의 가족 모 두를 알고 있습니까.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선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당신은 불쌍한 사람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오늘의 가난은 자초한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 믿기에 우리는 가난에 대한 묵상의 자격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내 가족, 내 이웃과 둘러앉아 서로의 여윈 얼굴을 매만지며 지친 어깨를 기대고 잊었던 내일을 이야기하자. 마침 개기월식,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그 빛을 모두 잃는다 해도 그것은 잠시. 잠들지 않고 기다 리는 이들에게 달은 곧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화제의 으뜸이 될 연말 대선에 이르면 지역감정, 보수를 가장한 수구, 안정론 속에 숨겨진 부패, 몰이성적인 색깔론, 정치인들의 잦은 변신과 잔꾀 등 우리의 희망 을 꺾었던 쓰레기들을 하나씩 정리해보자. 이 쓰레기들 때문에 우리는 지 금껏 두통에 시달려야 했고 헛된 싸움에 몸을 맡겨야 했다.

그리하면 한가위를 이렇듯 실컷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남이 추석이라 하니 나도 추석이라 해도 좋고, 때때옷 입는 어린이들이 추석이라 하니 어른 역시 추석이라 해도 좋다. 세화연풍해서 이 날을 즐겨도 좋고 거친 세파에 이날만은 쉬어보자 해서 이날을 즐겨도 좋다.”(<신세시기>, 천관 우)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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