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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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아를 살려라. 김선홍 회장이 `제2의 봉고신화'를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퇴냐 아니면 버티기냐”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의 결단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김 회장은 지난 9월2 일 밤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일본에서 귀국한 뒤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 김 회장이 귀국 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거취에 대해 언급할 것으로 예상했던 주변의 시각과는 외견상 동떨어진 모습이다.
김 회장의 결단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부도유예협약 만료기간 인 9월29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나 채권단이 협약연장 불가방 침을 분명히 하는 등 사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9월29일 부도유예협약 만료
전국 35개 은행장들은 9월1일 부도유예협약을 개정해, 앞으로는 부도유예 기간을 2개월 이내로 제한하고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하기에 앞서 경영권 포기각서 등 채권확보 서류를 관련기업으로부터 모두 받기로 했다. 은행 들은 기아 등 이미 협약을 적용받고 있는 기업에는 개정 내용을 소급 적 용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김 회장이 사표를 내지 않는 상황에서 기아에 대한 협약연장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금융권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기 아가 지난 7월15일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은 뒤 부도가 유예된 금액이 3 조5천억원에 이르고 9월 말까지는 5조∼6조원으로 불어날 것이 뻔해 협약 이 연장되지 않는 한 기아의 부도나 법정관리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재경원은 지난 9월3일 한술 더 떠 사실상 기아를 해체하겠다는 뜻을 분명 히 했다. 강만수 재경원 차관은 기아그룹 28개 계열사 가운데 기아자동차 는 협약기간이 끝나더라도 은행관리나 법정관리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정 상가동시키겠지만 나머지는 제3자에 매각하거나 청산절차를 밟겠다고 밝 혔다.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차와 함께 회생시키거나 제3자에 매각하는 방 안을 함께 고려중이라고 덧붙였다. 기아채권단이 기아 계열사에 대한 처 리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실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강 차관의 발 언은 ‘자구노력을 통한 회생’이라는 김선홍 회장의 기아 해법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다. 정부가 시중은행에 대한 3천5백억원의 한은 총액한도대출 을 통해 기아 협력업체들에 7천억원을 지원해 주기로 한 것도 기아 살리 기보다는 협력업체의 연쇄부도 방지 차원이다.
기아그룹 일반직 사원들의 모임인 ‘기아종업원 비상재건대책위원회’는 9월4일 성명을 통해 “강 차관의 발언은 정부가 ‘기아 죽이기’에 나섰 음을 간접 시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재경 원 안에서도 강 차관의 발언이 “기아처리는 채권단이 알아서 할 문제라 는 정부의 기존 방침을 퇴색시키고 공연히 분란만 일으켰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기아로서는 강 차관에 대한 성토 분위기를 즐길 여 유가 없다. 어차피 정부와 채권단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기아의 공중분해를 막기 위해서는 김 회장의 사표제출을 둘러싸고 지루하게 줄다 기를 벌여 온 교착상태를 타개할 묘수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 지난 8월25일 모스크바 모터쇼를 참관하기 위해 출국하기 전부 터 기아 안팎에서는 김 회장의 거취와 관련해 두가지의 물밑 흐름이 있었 다. 하나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의 기아차 소하리공장 방문을 계기로 표 면화된 ‘조건부 사퇴’ 방안이다. 조건부 사퇴안의 골자는 △기아를 제3 자에 인수시키지 않고 자구노력을 통해 회생할 수 있도록 정부와 채권단 이 최대한 지원하는 것을 이 대표와 신한국당이 보증하는 대신 △김 회장 이 연말을 시한으로 해서 사표를 낸다는 내용이다. 즉 이 대표쪽은 김 회 장이 중심이 돼서 기아가 올 연말까지 자구노력을 통해 회생노력을 펼치 고 그것이 실패하면 김 회장이 물러나는 것으로 정부와 기아 사이에서 타 협점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조건부 사퇴안은 김 회장이 사표제출을 거부 함으로써 무산됐지만 이 대표쪽은 김 회장의 외유 중에도 기아쪽 고위 관 계자들과 접촉을 계속하며 김 회장의 설득을 종용했다. 신한국당의 한 관 계자는 “이제 공은 기아에 넘어갔다”면서 “김 회장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건부 사퇴안은 정부의 더욱 강경해진 태도와 여권 내 이 대표의 입지 약화로 카드의 유효성이 불투명해졌다.
명예회장으로 퇴진, 대선 후 재기?
또 하나는 기아 안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김 회장이 일단 사표를 내 명예 회장이나 고문 등의 자리로 물러난 뒤 적당한 시점에서 재기를 모색하는 방안이었다. 이는 김 회장이 물러나면 자구노력의 중심이 사라져 회생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기아의 기존 입장과는 배치된 것이지만 김 회장에 대 해 극도의 불신감을 갖고 있는 정부와 채권단의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서 는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의 재기 모색 시점으로는 올 연말이 유력하게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는 공식적 으로 이런 시나리오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올 연말 대통 령선거의 쟁점으로 기아와 김 회장 문제를 부각시켜 정치적 해결을 모색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까지 그럴듯하게 곁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재경원이 9월3일 기아처리 방향을 밝히는 자리에서 김 회장이 명예 회장으로 퇴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미리 쐐기를 박고 나오면서 제동 이 걸렸다. 재경원은 그동안 내부적으로는 김 회장의 사표 제출은 곧 완 전 퇴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김 회장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배경에는 이처럼 그동안 거론돼 온 방안들이 모두 현실적으로 쉽지 않게 된 데 따 른 고민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익명을 전 제로 “솔직히 내부에서도 김 회장이 사표를 쓸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의 견들이 있었지만 강 차관의 말이 나온 이후 쑥 들어갔다”면서 “정부 말 대로라면 김 회장의 사표를 내더라도 기아는 공중분해된다는 것 아니냐” 고 목소리를 높였다. 즉 김 회장이 협약 만료 전에 사표를 내더라도 기아 만 은행관리를 통해 정상화를 유도하고 나머지는 제3자 매각이나 청산절 차를 밟는다면 어차피 기아는 해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아 안팎에서는 아직은 기아를 제3자에 매각하기보다는 자동차전 문기업으로 회생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한 만큼 김 회장이 자신의 사 표를 지렛대로 지금이라도 기아의 회생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 지고 있다. 기아의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이 지나치게 재다가 실기했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의 사표제출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발벗고 나서야 한다 ”고 말했다. 경실련이 기아그룹의 존속을 전제로 김 회장의 퇴진을 촉구 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등 기아에 우호적인 다 른 기업들도 초반에는 김 회장 퇴진=제3자 인수라는 등식이 설득력을 가 졌지만, 최근 들어 김 회장의 강경 태도가 오히려 정부에 기아 해체의 명 분을 주고 있다는 비판이 늘고 있다며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대기업의 연쇄부도와 기아사태로 인해 경제 전체에 주름살이 지고 금융위기가 고조 되고 있는데도 정부와 김 회장이 국민경제와 기아를 담보로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정부는 물론 김 회장에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 주변에서는 김 회 장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일 때 정부도 기아 해체 또는 제3자 인수라는 강수를 그대로 밀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 도 많다.
‘사표불가’가 정부에 명분 준다
김 회장은 기아사태가 터진 뒤 여러차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 “ 부도유예협약 적용기간이 끝나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측근들에 게 밝혀왔다. 기아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을 누구보다 먼저 져야 한다는 원칙론과 기아 회생의 중심이 필요하다는 현실론 속에서 고민하는 김 회 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 한국의 아이아코카라는 명예로운 별명까지 갖고 있는 김 회장이 ‘제2의 봉고신화’를 위해 마지막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 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