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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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可山)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단편문학의 백미이자, 작 가의 문학혼을 단 한편에 농축시킨 수작이다. 1백장을 넘지 않는 짧은 분 량에 탁월한 묘사력과 절제된 미학이 완벽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 품을 접하고 나면 마치 뇌리에 각인된 듯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마력이 있다. 바로 우리 정서의 정곡을 짚은 위대성이 아닐까.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요즘도 작품의 무대였던 봉평은 향수처럼 낯익은 고장으로 여겨지고 , 늘 가보고 싶은 그리움을 자아낸다.
지금 봉평은 메밀꽃이 한창 피어나 효석의 생가는 메밀밭에 잠겨 있다. 가을 햇살이 화사한 그의 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이고, 소박한 인심의 새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을 가족처럼 맞아준다. 1913년 당시 봉평 면장이던 효석의 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이웃에 살던 지금의 주인 홍종률(52)씨 의 증조부 홍명렬씨에게 집을 넘겨주고 도회지로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 터 어언 8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홍씨 집안은 이 집에서 4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숱한 외지 손님들이 다녀갔고,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정성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열기가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니 놀랍다. 홍씨 가족들은 옛 이웃의 정과 손님들의 정성을 생각해 정중하게 사람들을 맞는다. 초가였던 지붕이 함석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집의 원형 은 아직 여전하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옛집의 모습을 지켜온 주인 덕이다 . 집을 비워야 하는 농사철에는 손님들이 빈집에 그냥 다녀가는 것이 안 쓰러워 마당에 잠시나마 앉아 쉴 자리를 마련하고 방명록을 놓아두기도 한다.
여러 해를 두고 꾸준히 찾아오는 이들은 이제 주인과 친척이나 다름없다. 스스럼없이 음식을 나눠먹으며 정을 잇고 있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부터 는 이들의 간청으로 음식 뒷바라지까지 해준다. 가산문학선양회와 젊은 공무원들이 벌이는 메밀 심기에 참여해 직접 수확한 메밀로 전과 수제비 를 만들어 내는데 맛이 일품이다. 메밀전이 2천원, 메밀 수제비가 3천원 으로 실비나 다름없고 일손이 넉넉할 때는 메밀묵도 쒀준다.
아무 꾸밈이 없이 소박한 차림의 수제비는 멸치와 무, 파 등을 넣고 푹 삶아 조선장으로 간을 해 육수맛이 깔끔하다. 집에서 메밀을 갈아 반죽한 수제비에 김치 무친 것과 김을 얹어 주는데 거칠거칠하고 구수한 맛이 먹 을수록 입에 당긴다. 옛날 효석의 식구들과 서로 오가며 함께 나눠먹던 맛 그대로라고 한다. 바람결에 하얀 메밀꽃 향이 은은하게 배어나는 생가 마당에 둘러앉아 먹는 메밀 수제비와 메밀전은 맛도 맛이려니와 작품의 무대 속에 함께 어우러지는 듯한 정취가 그만이다.
지금 가면 추석을 앞둔 절기여서 작품에 그려진 대로 “이지러는 졌으나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는 달빛”과 “달빛에 한층 푸르게 젖은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도 감상할 수 있다. 승용차가 아니어도 강릉행 직행버스로 장평에 내려 봉평으로 오르는 버스를 이용하면 당일로 다녀올 수 있고, 봉평장터와 흥정천변의 민박에서 하루쯤 묵어오면 더욱 좋다.
메밀꽃이 반기는 문학의 고향
강원도 평창군 봉평은 이제 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고장이다. 길이 좋아진 탓도 있겠지만 이곳을 찾는 발길이 해를 거 듭할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고랭지 채소에 밀려났던 메밀밭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물방 앗간으로 가는 길목에는 가산공원과 기념비가 서는 등 지역의 관심도 높 다. 명실공히 문학의 고장다운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어 위대한 작품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추석연휴 나들이길로 떠나 흥정계곡에서 하루쯤 묵어와도 불편은 없다. 장터에서 2.5km 떨어진 흥정천 물가에는 강변민박(0374-32-0594)과 산장 민박(0374-32-0826)이 있고, 장터에는 콘도식 시골민박(0374-32-0201)이 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