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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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강제를 없애보자. 그러면 중력이란 보편적 법칙에 따르게 되어 남녀 양성은 모두 각각의 적당한 위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지 3년 뒤인 1792년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여권옹호론>의 한 대목이다. <여권옹호론>은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문제와 그 해결방법을 제시한 최초의 체계적인 저술로 오늘날 페미니 스트의 성서로 불리는 작품이다.
유럽에서 남녀평등 혹은 여성의 권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한 건 계몽주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부터였다. 로크,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 상가들은 당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기회균등을 주장했는데 이때의 인 간은 곧 남성을 뜻했다. “여성은 이성적으로 미개하므로 우월한 이성을 지닌 남성 즉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교화되어야 하며, 여성의 종속은 불 가피한 현상이고 그것이 곧 자연법”이라고 루소는 말했다. 이에 대해 “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여성이 복종할 대상은 이성( 理性)이지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다”고 주장한 이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다.
메리는 여성의 낮은 지위와 지적 열세는 교육제도의 불평등에서 비롯하며 , 그것을 개혁하려면 사회개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리는 프랑스혁명에 열광했다. 혁명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는 프랑스로 건너간 메리는 토머스 페인, 콩도르세, 탈레랑 등 혁명가들과 사귀면서 < 여권옹호론>을 썼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여성이 인생 최고의 행복을 얻으려면 남성에게 경제적 정서적으로 의존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남성처럼 사회에 쓸모있는 시민이 되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메리는 역설했다. ‘ 쓸모있는 시민’이란 사회에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분야를 담당함을 말 한다. 새로운 사회의 여성은 유용한 존재여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 그는 사회참여의 한 방법으로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길을 제시했다. 자 녀를 바르게 교육시키는 일 역시 하나의 당당한 ‘직업’이란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당시 영국 여성들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중산 층 여성들에게.
메리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미국인 사업가 길버트 임레이 와 동거에 들어간 메리는 파경을 맞고 두번이나 자살을 시도했고, 영국으 로 돌아가 옛 동료 고드윈과 결혼했다. 둘 다 기성의 결혼제도에 비판적 이었으므로 동거로 시작했으나 메리가 임신을 하자 곧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메리는 딸을 낳은 지 열흘 만에 출산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 38세. <여권옹호론>을 발표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딸 메리는 시인 셸리와 결혼했고 소설가가 된다. <프랑 켄슈타인>의 저자가 바로 그다. 임레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프란시스 는 훗날 시인 바이런의 연인이 됐다.
메리는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정치참여를 갈망하던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 여성들을 대변했다는 평을 받는다. 혁명 후 유럽사회를 이끌게 된 신흥세 력이 부르주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래서 오늘날 메리는 온건한 중산층 여성운동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 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자연인임을 아무도 자신있게 말하 거나 체계를 갖추어 설명해내지 못하던 그때, 여성에 대한 억압과 불평등 의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제시하고 여성문제를 사회개혁과 연결시켜 파악한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9월25일 제 1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