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만리재에서

KAL기 참사보다 더 무서운 것

분노는 하늘을 가리고 오열은 바다를 덮었다. 자식을 살리려 몸을 내던진 어머니, 승객을 구하기 위한 여승무원의 헌신, 신부 대신 죽음을 택한 신 랑의 사랑. 그 숭고한 테마들은 감동 대신 오히려 분노와 오열의 깊이만 더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상실 앞에서 잠시 동안도 넋을 놓지 못한다. 단 호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더 큰 파국은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순간의 혼 절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기아 사태다. 종업원수만도 5만여명. 헙력업체는 1만9천여개에 60여만명. 가족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까. 그들은 지금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파괴되어 가고 있다. 이미 대부분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잇다. 인명 의 상실을 숫자로 따져 아픔의 크기를 따질 수는 없지만 그 엄청난 숫자 는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그러니 무조건 살려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들은 목을 조이는 `지옥사자'가 누군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 을 뿐이다. 이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

우선 재경원 관리들이 출입기자들에게 흘렸다는 김 회장의 비리의혹 등은 이제 A4용지 7장 분량으로 잘 정리돼 시중에 뿌려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각 정부 일각에서는 기아 일부 임원들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 이 흘러나온다. 급기야 기아에 대한 전면적인 세무조사 가능성도 거론된 다. 순전한 소문이라고 대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아죽이기는 의도된 소문에서 시작했다. 게다가 정부는 연쇄부도 직전으로 몰려 있는 협력업 체들에 대해 "그것은 은전히 기아 책임"이라며 `차도살인'을 꾀한다. 금 융권은 3천억원을 웃도는 협력하지 않아서일까.

둘째로 은행들은 이제 기아의 수출신용장까지 매입하려 하지 않는다. 우 리 은행보다 몇십배 신용도 높은 외국 은행들이 지급보증한 게 수출신용 장이다. 신용장을 담보로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융자해주던 게 은행들이 고 이를 재촉한 게 정부였다. 그리고 천문학적 규모의 무역수지 적자를 우려해 한푼이라도 더 내다 팔라고 독려해온 정부다. 그런데 유독 기아에 대해서는 수출도 막아버린다.

국민은 2백26명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이 정부의 책임을 따질 기력마저 잃었다. 93년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때 정부의 무능력을 질타했던 일은 먼 옛날 이야기다. 그것은 이 정부에 대한 미련 을 싸그리 포기했기 때문일 터인데도 정부는 이런 탈진 상활을 전면적인 기아죽이기의 기회로 받아들이나 보다. 위의 목조르기는 KAL기 참사의 어 수선함 속에서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옹색한 꼬락서니가 보는 이를 비참케 한다.

"제발 살려주세요." 참사에 가려 거의 들리지도 않는 기아 협력회 회장 홍성만씨의 절규가 따갑다. "왜 우리까지 죽이려 합니까. 기아가 밉다고 자동차 산업을 떠받쳐온 협력업체들까지 쓰러뜨리려고 합니까." 괌에서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한 고인들은 어쩌면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곳에선 수십만의 가족이 천천히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며 침몰하고 있으니 말이 다.

강경식 부총리에게 묻고 싶다. 강 부총리는 부산 신호공단에 승용차공장 을 유치하기 위한 민간기구의 위원장이었다. 그는 대구로 가려던 공장을 부산으로 돌려놓고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 재정경제원 장관인가 아니면 여전히 유치위원회 위원장인가.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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