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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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치료할 수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치자. 과연 믿을 사람 이 몇이나 있을까. 의사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상인이라 면 잽싸게 계산기를 두드릴지 모르겠다. 엄청난 노다지를 캐게 될 테니까 . 그런데 목사 김상태(59·서울 동교회)는 하늘의 약속인 양 그 말을 믿 는다.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암은 불치병이 아니다. 암으로는 결코 죽 지 않는다. 정 믿기지 않으면 여기 나를 보라!”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이끌어
그렇다고 그가 손 끝으로 기적을 부리는 성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동네 교회에서 만나는 그저 그런 목사 같다. 다만 대단한 말라깽이다. 껑충 큰 키에 얼굴은 광대뼈가 고스란히 불거졌다. 막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의 모 습이다. 아니나 다를까. 병력이 화려하다. 위암 말기 판정. 세번에 걸친 수술. 식도 일부와 위장, 췌장, 비장 제거. 3개월 시한부생명 선고. 그러 면서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이란 거창한(?) 모임을 이끈다. 5년이 넘도록 안 죽고 살아 있으니 그럴 자격이 있단다.
그가 암 환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여느 암 환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암 인줄 몰랐고,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처음 쓰러진 건 91년 10월이었다. 새벽기도를 올리다 그대로 넘어졌다. 검사를 해보니 위산과다에 의한 위 궤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안 그래도 새벽만 되면 속이 쓰린 터라 그러 려니 했다. 한달 뒤 또 쓰러졌다. 이번엔 피 속의 헤모글로빈 지수가 낮 다는 판정이 나왔다. 보름 동안 온갖 검사를 다 했으나 역시 암은 발견하 지 못했다. 그러다 92년 2월 위암이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암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술대에 누웠다. 배를 짼 의사는 안을 보더 니 그냥 덮으려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부득부득 우겼다. 죽어도 좋으니 일단 잘라내자고. 그때 식도 끝부터 위장, 췌장, 비장이 몽땅 사라졌다. 십이지장을 끌어올려 식도에 이어 붙였다. 배변을 위해 배와 옆구리에는 호스를 박았다. 설상가상으로 수술 1주일 만에 복수가 차올라 수술자리가 터지는 바람에 재수술까지 받았다. 입원 석달째가 되자 의사가 퇴원을 권 했다. 길어야 3개월이라는 사형선고와 함께.
병원에 있을 때만 해도 목사였다. 어서 교회에 돌아가 설교하고 싶은 생 각이 굴뚝같았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늘나라가 가 까워졌음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누워서는 천국의 환상을 보기도 했다. 마침 스피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는데 그게 꼭 천국 의 소리마냥 아름다웠다. 천장에서는 천사가 활짝 미소짓고. 그래서 퇴원 이틀 뒤 강단에 서 설교까지 했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하느님! 감 사합니다.”
명동에서 알아주던 깡패
그러나 집에 누워 있으니 사정이 달라졌다. 목사도 별 수 없는 사람이었 다. 죽는 게 두려웠다. “죽은 이는 하느님의 품 안에 들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유족들을 다독거리던 게 까마득했다. 천국에 들지 않고 오두막 에 떨어지더라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암에 좋다면 닥치는 대로 사서 먹었다. 풀뿌리에서 짐승의 살점, 심지어 돌가루까지. 그게 대부분 암 환 자들의 살고픈 열정을 악용한 검은 상술이라는 걸 깨치는 데는 많은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보다 깊은 우울증.
당시 그는 미라처럼 말라붙었다. 1백81cm에 85kg이던 몸이 겨우 41kg 나 갔다. 본디 어디 가면 목사 아니라고 할 정도로 건장한 체격이었다. 어쩌 다 시비가 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지레 겁먹고 물러설 정도였다. 군에 서는 사단 씨름대표로 뽑힐 정도였고, 젊어서는 주먹깨나 쓰던 몸이었으 니 그럴만도 했겠다. 그랬던 그가 피골상접한 몰골이 되니 사람들이 눈물 만 흘리더란다.
주먹 얘기가 나오자 대화가 삼천포로 빠진다. 목사가 되기 전엔 명동의 알아주는 깡패였단다. 그 사연이 투병기 못지않게 극적이다. 6·25전쟁 직후 어느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차장과 시비가 붙었다. 운전사까지 합세해 대드는 걸 내다꽂았다. 마침 버스 안에 김두한이 있었다. “내 밑 에 들어와라.” 그 말 한마디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돈과 향락. 최고급 승용차에 양복에 구두에 넥타이까지 차려 입고 멋쟁이로 행 세했다. 선배들이 “그 놈 머리 좋으니 검사시켜 써먹자”며 대학까지 들 어가도록 해줬다. 부랑아에서 폭력조직의 중간보스로, 대학생으로 그로선 출세가도를 질주한 것이다.
운도 좋았다. 5·16쿠데타가 터져 전국의 깡패들이 군홧발에 밟힐 때도 그는 화를 피했다. 마침 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 일으킨 짓이 어선지 군인에겐 퍽 관대했다고 한다. 군복만 입고 명동서 살던 ‘나이롱 군인’(돈만 주면 1주일 휴가증을 사던 시절이었다)이었는데도 건들지 않 더란다. 우습게도 깡패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져 트럭타고 명동으로 가 기도 했단다. 우연히 들른 천막교회에서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화려한 시 절이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그토록 건강했던 것처럼.
의사가 삶의 한계로 정해준 3개월을 하루 넘기면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 다.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몸은 약해지고, 식도와 십이지장을 연결 한 곳에 악성종양까지 생겼는데도 살아 있지 않은가. 절망을 뚫고 살 수 있다는 의욕이 솟구쳤다. 그때 우연히 한 잡지에서 게에서 뽑아낸 키토산 이 암을 억제한다는 글을 봤다. 바로 키토산 권위자를 찾았다. 마침 그는 쥐를 대상으로 키토산의 항암효과를 연구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달려가 “나를 쥐로 써달라”고 매달렸다. 그리고 그게 기적을 일으켰다. 암세포 가 사라졌고, 몸무게도 54kg으로 불었다.
키토산 연구자에 “나를 쥐로 써달라”
그가 암을 이겨낸 비결이 딱히 신묘해보이지는 않는다. 키토산을 만난 행 운을 빼면 더욱 그렇다. 나름대로 식이요법을 완성했지만 의학적으로 검 증된 것도 아니다. 그는 물은 꼭 광석을 통과한 정화수를 마신다. 하늘에 서 내려온 물이 땅에 스며들면서 광물질을 품도록 한 섭리를 이용한 것이 다. 여기에 채소는 반드시 끊여먹는다. 땅이 크게 오염돼 있어 아무리 깨 끗이 씻어도 허사라고 믿기 때문이다. 열기에 파괴되는 영양소는 알약으 로 해결한다. 그럼으로써 암 세포로 약해진 몸기운을 추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이 방법이 만사형통의 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 그는 다만 암을 불치병이라 여기고 절망하지 말자고 외친다. “암 환자 는 수술보다 수술 후의 고통이 더 큽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기 때 문이죠. 그때 삶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는 암 환자의 90%는 우울증 환자라고 믿는다. 암은 불치병이라 지레 믿 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꿎은 가족들에게 성질을 부리고, 0.1초 만에 눈물 을 흘린다. 그러니 병이 나을 턱이 없다. 암을 이기기 위해선 무엇보다 밝고 건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그의 암 이기는 비법은 따지고 보면 절망 하지 말자는 거다. 암을 이기려면 이렇게 외치란다. “네버 세이 노.”(N ever Say No·절대 안 된다고 말하지 말라)
사진 정진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