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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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시인·상지대 교수
시가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중이 시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 생산현장에서 시는 흘러넘친다. 이 말은 단순히 한국에서 많은 시들이 생 산되고 있다는 말만은 아니다. 대중과 매스컴의 외면과 푸대접 속에서 생 산되고 있는 한국의 시들은 지금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생명력으로 흘러넘친다. 시가 읽히지 않는 현상은 사회가 신성함을 잃어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현상이다. 현대시가 너무 어려워서 대중의 외면을 자초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현대 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현대시가 생산되고 있는 문화적 환경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현대시는 어려운가
세계문화사적으로 현대시는 출발 당시부터 ‘반담론’의 입장을 취해왔다 . 시는 권력이 세계를 경영하는 원리의 대체적인 노선 주변에 만들어가는 언어 구축물, 즉 당대의 ‘담론’과 전혀 다른 원리를 따라 자신의 운명 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대시는 앞으로 인류에게 일어날 일들이 ‘ 산업화’라고 하는 무차별적 개발원리,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추방시켜 ‘ 존재론적 소외’를 강화하는 방향을 따르리라는 것을 예감했던 것이다. 밥을 더 먹게 해주마, 좋은 옷, 빨리 움직여서 시간이 없다는 환상을 가 지게 해주는 빠른 탈것, 그리고 그때그때 삶의 근원적인 무의미를 잊게 해주는 가짜 문화들, ‘키치’를 주마. 그러나 ‘의미’는 따지지 마라. 세련된 돼지처럼 살아라. 진주는 없다. 알겠니? 비유적으로 말하면, 현대 시는 ‘진주는 있다’고 믿는 쪽에 패를 던졌다는 말이다. 배고프고 가난 하고, 촌스런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난 잘먹고 잘살기 싫어. 대신 난 진실을 원해.
얼추 19세기 말경에 시작된 이 문화적 사건은, ‘시’라는 장르가 이미 어떤 정해진 형태로 쓰여지는 ‘짧은 문학’이 아니라, 어떤 반세계적 인 식이며, 사회가 강요하는 외적 물질적 요건에 만족하지 않는, ‘담론’에 길들지 않는 절대적인 ‘불평쟁이’들이 생산해내는 ‘반담론’이 되게 만들었다. 이 ‘반담론’은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현대시의 모든 특징들은 결국 단 한가지 특성 주위로 수렴한다. 현대시는 ‘언어’ 에 대한 극도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권력행사가 결국은 온갖 종류의 ‘언어현상’의 왜곡을 통해 이뤄지고 있 다는 것을 현대시는 아주 민감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 특성의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문화와 언어 사이의 관 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을 요구한다. 다만, 현대시가 ‘어려운’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는 사실만을 지적하 기로 하자. 일반 수준의 언어는 덕지덕지 때가 묻어서 존재의 순결성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현대시는 고도로 세련된 자신만의 말하기 방식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80년대가 ‘시의 시대’라고 말했다. 박노해, 황지우, 이성 복, 최승자 등의 스타급 시인들을 만들어낸 그 시대에 시는 대중과 소통 하는, 드물게 행복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시의 시대’라는 말은 허위 다. 현대시는 그 특성상 절대로 자기의 시대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처 음부터 세계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거지의 말’이다. 굉장히 고급스러운 인식을 확보하고 있지만, 분명히 ‘거지의 말’이다. 그것은 시인들이 물 질적으로 궁핍하다는 말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들의 말이 절대적 소수 의 힘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80년대를 ‘시의 시대’이게 했던 것은 우리 사회의 내적 정치적 콘텍스트였지, 세계문화사적 콘텍스트는 아니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문화의 당대적 콘텍스트를 벗어나 세계문화 사적 콘텍스트를 이해하기 시작한 시들이 비로소 생산되고 있다.
‘가난한 말’에 귀를 대자
기회가 주어진다면, 왜 이 ‘가난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찬찬 히 설명해보고 싶다. 그러나 ‘시’에 대해 대중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아예 주어지질 않는다. 더더욱 시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제도의 간섭이 심하다는 사실이다. 현대시가 그 자체의 특성 때문에 ‘매 개’되지 않고는 대중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학을 통한 권력행사 에만 관심이 있는 비평가들은 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시를 다루어봐야 힘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문학기자들도 시는 거들떠보 지도 않는다. 대중을 만족시켜주는 달콤하고 쉬운 시들이나 그저 이따금 구색맞추기로 언급될 뿐이다.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시.
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현대시를 소 비할 줄 안다는 것은, 무차별로 휘몰아치는 천박하고 저급한 물질문명의 급류 속에서 ‘자아’의 독립성을 지켜낼 줄 안다는 뜻이다. 내가 문화정 책 입안자라면, 현대시를 소비시킬 방법을 당장 생각해 보겠다. 돈도 별 로 안 들고, 아주 효과적인 결과가 빠른 속도로 나타날 텐데 말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