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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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 좌파 정부가 최근 발표한 ‘가족수당’ 개정방안 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족수당 적용범위 수정’으로 시작된 찬반논쟁이 이제는 사회적 연대, 평등, 형평, 소득재분배 등 철학적·사 회과학적 개념 논쟁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가족수당’이란 육아수당과는 별도로 자식이 2명 이상이면 소득에 관계 없이 일정액을 받는 프랑스 고유의 가족복지정책이다. 조스팽 정부하에서 고용 및 사회적 연대 장관을 맡고 있는 마르틴 오브리는 지난 6월 소득에 관계없이 무조건 가족수당을 주는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난다며 가족수당 지급에 새로운 소득 상한선을 만들었다. 월 2만5천프랑(약 4백만원)의 고 소득자 가계에는 더이상 가족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개정 안이 통과될 경우 가족수당이 깎이는 대상은 50만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 산된다.
하지만 이 안이 발표되자마자 여론은 이내 찬반으로 갈라졌고, 격론이 시 작됐다. 전체적으로 저소득층은 긍정적이다. 이 개정안이 소득재분배 논 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판단 탓이다. 그러나 우파 성향의 단체들과 노조들 은 이 안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곳곳에서 연합시위 로 항의의 뜻을 정부에 전하고 있는 상태다.
소득재분배 놓고 좌우대립으로 치달아
물론 정부의 홍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당의 중진의원 장 글라바니는 한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이 개정안의 정당성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국 회의원인 나도 저소득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수당을 받지만 그것은 단지 자식이 많기 때문”이라면서 “국회의원, 기업체 사장까지 복지수당을 받 는 것은 뭔가 비정상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우파 지도자이며 전 교육부 장관인 프랑수아 바이루 의원은 정부 의 소득 상한선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월 2만5천프랑은 소득면에서 중간층이라고 할 수 있는 평교사 부부의 가계 월수입 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데 이들을 고소득자로 규정하고 가족수당을 삭제하는 것은 뭔 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좌파 중에서도 상당수는 비판쪽에 목소리를 보탰다. 좌파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논설위원 자크 쥐이야르는 사설에서 “왜 하필 가족수당 이냐”고 비판적 의견을 내놓았다. 소득재분배라면 다른 수단도 많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안에 대한 반대의 절정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텔레비전 인터 뷰였다. 프랑스 최고의 국경일인 7월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 가진 인터뷰 에서, 그는 조스팽 정부의 가족수당 개정을 공개적으로 비판에 나선 것이 다. 요지는 역시 가족수당은 소득재분배 정책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수당은 가족 및 인구정책의 하나이며 또한 직장여성을 보조하기 위 한 정책”이라고 정의한 뒤 “가족수당에 소득 상한선을 도입하면 특히 직장여성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조스팽 정부를 ‘훈계’했다. 물론 이런 시라크의 훈계가 정부의 정책시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원집정 제 성격을 갖는 프랑스에서 대통령은 외무·국방 분야만을 담당할 뿐 내 정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 훈계의 상징적인 의미는 상당히 크다.
반대 여론이 예상외로 거세지자 정부는 자식 3명까지는 종전과 마찬가지 로 소득제한 없이 가족수당을 지급하겠다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정부는 또 우파 노조 지도자들과 대화를 거치면서 소득상한선을 상향조정할 의향 또한 내비쳤다. 하지만 좌파정부는 “가족수당도 소득 재분배라는 대원칙 의 적용을 받는다”는 태도는 고집한다.
재미있는 것은 애초 조스팽 정부 개혁안에 대한 찬반논쟁에서 시작한 가 족수당 논쟁이 지식인들에 의해 ‘가족수당의 근본적 성격, 사회적 연대 와 형평의 문제’ 등 근본적 사회이념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 이다. 우선 이 개정안에 찬성하는 쪽은 이 문제를 “고소득자들에게 복지 수당이 필요한가”라는 문제로 이해한다. 이들은 “고소득자들은 복지수 당의 분담자이지, 혜택대상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족수당이 인구정책이며 동시에 직장여성지원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논쟁은 꼬인다 . 현행 가족수당제도 옹호론자들은 “자식을 많이 두는 데 대한 보상은 사회구성원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히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한다. “소득과 상관없이 가족수당의 혜택을 누려야 진정한 사회적 연대 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수당은 직장여성 지원책인가
논쟁이 확산되자 경제전문지 <르 누벨 에코노미스트>는 최근 지상논쟁을 마련했다. 이 논쟁에서 노조 간부인 마르크 빌브누아는 이 문제를 보편성 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는 “소득재분배는 소득세 및 각종 세금정책을 통 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제한 뒤 “고소득자들의 복지분담금은 이미 과 중한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마당에 가족수당이라는 ‘평등한 시민권리’마저 박탈한다는 것은 보편성이 결여된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 “오늘날 필요한 것은 형평보다는 평등, 선택주의보다는 보편주의, 보 조정책보다는 계급계층간의 광범한 사회적 연대”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 멩티냐노는 “일반 권리의 평등한 적용주장은 환상” 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복지정책의 일괄적인 평등한 적용보다는 정책별 로 ‘형평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화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이 문제에서도 좌우파의 대립은 여전 하다. 전반적으로 프랑스 좌파들은 “모든 복지분야를 고소득자가 분담해 야 하며, 국가는 저소득계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시각인 반면, 우파들은 “지금은 계층계급의 구별없는 광범한 평등과 사회적 연대가 중요한 때”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최연구 통신원
주제: “아이 낳으면 나라가 기른다”
부제: 육아 장려하는 프랑스의 가족정책… 가족수당 개정으로 인구 감소 우려
육아 및 가족 정책이 프랑스만큼 잘돼 있는 나라는 드물다. 원래 가족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의 전통과 잘 짜인 대륙식 복지정책이 맞물려 프랑스에 서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하나의 ‘특권’으로 존중되고 있다. 특히 인구 감소를 우려하는 프랑스에서는 대가족을 장려해 대가족일수록 더 많은 복 지 혜택을 준다. 가족이 많을수록 과중해지는 가계부담의 일부를 국가가 분담하며 여러 가지 형태로 보조해주고 있는 것이다.
태아뿐 아니라 산모도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수 행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최우선적인 보호의 대상이 된다. 국가에서 발행 하는 임신증명서는 모든 행정처리·공공교통에서 우선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증명서이기도 하다. 또 임신중인 직장여성은 절대 해고되지 않으며, 러시아워를 피해 출퇴근할 수 있게 돼 있다. 뿐만 아니라 임신 4개월부터 3세 때까지 한달에 15만원씩 지급되는 육아수당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국가보험은 임신부터 출산까지 드는 모든 병원비용을 100% 부담한다. 현 재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족수당은 육아수당과는 별도로 지급되는 가족보조금이다. 그 명칭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인구증가를 유도 하기 위해 대가족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대가족 장려금이다. 프랑스에서 대가족이라면 보통 부양해야 하는 자식이 3명 이상일 때를 말하지만 지금 까지 가족수당은 자식이 2명일 때부터 아무런 조건없이 자동적으로 적용 됐다. 이는 자식이 18세가 될 때까지 가계의 수입에 관계없이 지급된다.
자식이 두명일 때는 매월 6백71프랑(약 11만원), 3명일 때는 매월 1천5백 31프랑(약 25만원)의 수당이 지급되고 4명 이상일 때는 한명당 8백59프랑 (약 14만원)씩이 추가된다. 거기다가 이와는 별도로 각 아이마다 지급되 는 양육수당 월 9백60프랑(15만원)을 합하면 자식이 많음으로 해서 주어 지는 수당이 웬만한 사람의 월수입만큼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한 유명한 소설에는 “저 아이는 세탁기, 이 아이는 냉장고를 사게 해줬 고…”라는 대목까지 나온다. 그만큼 서민들의 가계에서 가족수당은 수입 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육아수당은 특히 맞벌이 부부에게는 큰 경 제적 도움이 되었다.
조스팽 정부의 가족수당 개정안을 반대하는 쪽에서 우려하는 것은 무엇보 다도 이 개정안으로 중간층, 맞벌이 부부의 출산, 가족관계에 부정적 영 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공공재정적자를 줄여야 하는 정부가 가족 수당을 소득과 연결하는 조처로 취함으로써 단기적으로는 정부예산을 대 폭 줄일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프랑스 인구증가정책의 전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개정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