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통신원 리포트

더이상 잠자는 의회는 없다

“아니 이들이 정말 노동당이 지명한 상원의원이란 말이야.”

지난 8월 초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지명한 상원의원들의 면면을 보고 영국인들이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31명이 모두 영국석유공사 전 회장, 최대 규모 슈퍼체인 ‘세인즈버리’ 회장, ‘믹스 앤드 스펜서 ’ 회장 등 재계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블레어 총리는 이미 지난 5월 총선 때부터 세습귀족제 폐지 등 상원개혁 의지를 내비쳤었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번 행동을 ‘참신한 상원’을 만 들기 위한 블레어 총리의 첫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왕성한 활동’ 을 벌이고 있는 인물들을 상원의원으로 임명해 “고루한 상원의 잠을 깨 워놓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현재 상원은 법적으로는 중요법안을 인준하는 상위기관이다. 하지만 하원에 비해 그 권한이 미약 할 뿐만 아니라 1천명도 넘는 의원 중 출석률이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 잠자는 의회’다. 그나마 출석한 의원들도 조는 듯 자는 듯 의석을 지킬 뿐이다.

블레어 총리의 이번 조처에는 세습귀족과 보수당이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상원에 노동당 의원들을 대거 진출시켜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그 인사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은 당내에조차 충격 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노동당이 ‘경제 무능 ’이라는 전통적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계 거물들을 끌어 들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의 이번 인선은 메이저 전 총리의 상원 천거 방식과 비교되면서 더욱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메이저 전 총리는 총리직을 떠나면서 고위직 장관을 지낸 동지들을 제쳐두고 관저에서 일하던 청소부 와 운전수, 전화교환원 그리고 부인의 개인 비서에게까지 작위를 받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블레어 정부쪽은 상원의원에게 주어지는 작위란 적당히 임기를 채운 고위 공무원들이 으레 받게 되는 훈장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함께 열심히 일할 인물들에게 주는 사기진작용 메달이라는 것이다. 남작 의 직위를 받아 상원으로 올라간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활동만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상원에서 이들 ‘노동당 상원의원’들이 어떤 바람을 몰 고올지 주목된다.

런던=권은정 통신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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