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한솔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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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솔제지 장항공장. 국내 신문용지 시장의 60%를 장악한 한솔제지는 앞으로 연간 4백만t 규모를 갖춰 세계 10대 제지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맏딸 이인희(70) 고문이 이끄는 한솔그룹은 9 0년대 들어 가장 사세가 확장된 재벌로 꼽힌다. 삼성가에서 분가하던 지 난 91년, 50대 그룹에조차 끼지 못하던 한솔은 지난해 재계순위 22위로, 처음으로 30대 재벌에 끼어들더니 올해엔(4월 기준) 16위로 무려 6계단을 뛰어올랐다. 올해 초 취업전문업체 리쿠르트가 전국의 대학생 6백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솔은 10년 뒤 국내 재계순위 10위 안 에 들 가능성이 가장 높은 회사로도 꼽혔다.
인수합병의 예술(?)을 보여주다
그러나 한솔의 급성장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말도 많다. “인수합병(M&A )으로 큰 재벌, 특혜로 성장한 기업”이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한솔은 실 제로 21개 계열사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개를 인수합병을 통해 계열사에 편입시켰다. 한솔화학을 비롯한 7개 계열사가 한솔제지(옛 전주제지)에서 특정 사업부문을 떼어내 만든 회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솔이 스스로 일 군 회사는 한솔제지와 한솔PCS 정도에 불과하다.
“집을 세놓고, 그 돈으로 또다른 집을 산다.” 한솔의 인수합병 전략을 빗댄 말이다. 우선 자본금이 적은 기업을 사들여 인수회사 이름으로 전환 사채를 발행하거나 증자로 자금을 마련한다. 그 돈을 종잣돈으로 해 또다 른 기업을 인수한다. 또는 상장기업을 인수한 뒤 비상장된 계열사와 합병 함으로써 얻어지는 주식의 시세차익을 활용하는 것이다. 교과서적인 파이 낸싱 기법이다.
그룹의 모태격인 한솔제지는 93년부터 94년 초까지 5차례에 걸쳐 1천억원 어치의 사모전환사채(CB)를 발행한 뒤 같은해 4월 동창제지(현 한솔판지) 를 인수했고, 5월에는 5백억원어치의 CB를 다시 발행해 다음달에 동해투 자금융(현 한솔종금)을 인수했다. 95년 2월에는 3백억원어치의 CB를 발행 해 영우화학(한솔화학)과 한국마벨(한솔전자)을 사들였으며, 6월에 한국 마벨 명의로 1백억원어치를 발행해 광림전자공업(한솔텔레콤)을 인수했다 .
지난해 상장회사인 영우통상을 인수해 비상장회사인 한솔유통을 사실상의 상장회사로 만든 것은 인수합병 기법에서 가히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 다. 94년 이후 3년째 계속 자본잠식을 기록해 상장 폐지될 위기의 영우통 상을 사들인 한솔은 지난해 5월과 12월 모두 3백억원어치의 전환사채를 발행해 자본금을 늘리는 수법으로 간단히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한솔유통의 핵심사업을 고스란히 영우통상에 넘김으로써, 합병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한솔유통이 사실상 상장되는 효과를 거뒀다.
제조·정보통신·무역·금융분야 주력
그룹 관계자들은 “무엇보다도 국내생산량 1위를 자랑하는 한솔제지가 그 동안 안정적인 수익을 계속 냄으로써, 그 자금력으로 인수합병을 통한 사 세확장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매출 1조원을 달성한 한솔제지는 93년 1백21억, 94년 1백98억, 95년 4백2억, 지난해에는 4백46억의 순이익 을 기록했다. 문민정부 들어 불어닥친 개혁바람에 기존 재벌들이 투자를 미루면서 상대적으로 금융권의 돈을 끌어들이기가 쉬웠다는 점도 도움이 됐다. 이 고문이 신라호텔과 고려병원을 삼성에 넘기면서 갖고 있던 자금 도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룹의 비서실격인 사무국의 김중보 이사 는 “삼성이라는 대그룹의 우산 아래서 벗어나자 보호막이 갑자기 사라졌 다. 무엇보다 사세를 확장하는 것이 그동안 1차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 말한다.
한솔쪽은 이와 함께 “인수한 기업들이 대개 규모가 작아 인수합병에 많 은 자금이 들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한솔은 동해투금을 공개매수하는 과정에서 주식을 시가(1만9천원)보다 2배 가격에 사들이면서 2백억원 가 까운 돈이 들었을 뿐, 전체적으로 지금까지 인수합병에 든 자금은 1천억 원에도 못미치는 것으로 전해진다. 수적으로 계열사는 크게 늘었지만, 한 솔제지 자산이 전체 그룹 자산의 절반 정도인 2조원에 이른다. 인수합병 으로 인한 사세확장 성과가 그리 크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한솔은 올해 들어 더이상의 인수합병을 하지 않고 있다. 그룹 경 영위원회 부회장인 구형우 한솔제지 사장은 “그동안은 사업다각화를 위 해 기업인수 합병에 주력해왔으나 이제부터는 그룹의 내실을 다질 때”라 고 말한다. 그동안 한솔PCS 출범을 위해 1조원 가까운 투자를 해온 만큼, 이제 내실을 다지며 제지 분야를 중심으로 정보통신 등의 기존사업을 착 실하게 운영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다른 재벌들의 사업구조조정이 몸집 줄이기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동안 한솔의 사업구조조정은 신규사업진출을 바탕으로 한 사업다각화를 의미했 다. 한솔은 이제 주력사업을 제지업 중심의 제조업, 정보통신, 무역, 금 융분야 등 네축으로 정리했다.
인터넷폰 사업, 성장가능성 무한
그룹의 주력인 제지는 이미 튼튼한 기반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생산 규모 연간 1백80만t, 국내 신문용지 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한솔제 지는 생산규모에서도 앞으로 연산 4백만t 정도로 확대해 세계 10대 제지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국내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만큼 해외생산, 해외수출로 활로를 개척한다는 전략이다. 상반기 매출액은 5천 6백억원으로 지난해보다 13.1%가 늘었다. 특히 수출은 13.4% 늘어나 올해 엔 5백10억원의 순익을 낼 전망이다.
그러나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까지 불리던 개인휴대통신(PCS) 사 업에 대한 환상은 이제 깨야 할 때라고 한솔쪽은 말한다. 그동안 8천억원 에 이르는 투자를 했지만, 앞으로도 비슷한 액수를 더 투자해야 한다. 손 익분기점은 가입자 2백만명. 이동통신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2백만 가입자를 확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이동통신 5개업 체의 출혈경쟁으로 쓰러지는 곳도 생기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한솔 관계자 는 “합병되는 경우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손해보는 기업은 없을 것”이 라고 말한다. 성장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최근 한솔텔레컴이 한국과 일본, 미국을 잇는 해저광케이블 공사를 가허 가받은 것은 한솔의 정보통신사업에 날개를 단 격이다. 아직은 국내 및 해외업체와 성공적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성 공할 경우, 케이블 공사가 완료되는 3년 뒤부터는 한솔텔레컴이 추진하는 인터넷폰사업은 비약적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할 전망이다. PCS를 이용한 국제전화 요금도 지금의 절반 가까이로 줄일 수 있다.
한솔은 유통사업에서도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사이버백화점사업(한솔C SN)이 그것이다. 한솔CSN은 회원들에게서 연회비를 받고 일상용품, 주유 권, 호텔숙박권 등을 값싸게 공급자와 연결해주는 사업에 착수해 한달 만 에 14만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연회비 3만원씩만도 상당한 수입이다. 올 해 목표 20만명만 달성하면 백화점 한개를 지은 격이라고 한다. 연회비와 매출수수료만으로 미국시장에서 연간 19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CUC 인터 내셔날과 같은 기업으로 성장하는 게 한솔의 비전이다.
‘PCS사업 특혜’ 의혹은 남았는데…
한솔은 지난해 말부터 ‘점프21’이란 이름의 계열사별 대대적인 경영혁 신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내의 비합리적인 요소 제거, 업무활동 개선, 기 본원칙 준수, 각종 제안제도 활성화 등을 실천과제로 한 이 운동을 통해 한솔제지에서만 지난 상반기 동안 1백75억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거둔 것 으로 그룹쪽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솔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는 데는 “특혜받은 기업”이라는 부 정적 이미지를 씻어야 하는 부담이 크다. 지난해 공정위 독점국장과 증권 감독원장을 구속되게 한 뇌물제공사건, 김현철씨의 비자금 70억원을 이 고문의 둘째아들인 조동만 한솔PCS 부사장이 관리해온 사실 등이 그것이 다. PCS사업 진출에도 뒷힘이 작용했다는 의혹 역시 여전하다.
이와 관련해 한솔은 지난해 PCS사업에 진출하면서, 앞으로 한솔PCS를 증 자할 경우 1천억원 규모를 일반에 공모해 소유를 분산시키겠다고 약속했 다. 그뒤에도 약속 이행을 거듭 다짐했다. 이미지 개선을 위한 노력의 하 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탈색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어떤 노력이 계속 될지 주목된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