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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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1일 오전 7시30분. 몸살 탓인지 아침까지 비몽사몽이다. 설상가상으로 뙤약볕이다. 연신 땀방울 훔쳐보지만 헛수고다. 구룡산을 지나서는 불도저로 능선을 밀어 버렸는지 볕이 그대로 머리에 내리꽂힌다. 그래도 태백산은 위풍당당하다. "수고했다. 내가 진부령까지 데려다 주마. 어서 구름 위로 올라 타거라아!" 산신령을 만나는 꿈을 꺼본다.
눈을 뜨자마자 햇살이 따갑다. 오늘은 얼마나 더울지. 공포에 가까운 두 려움이 밀려든다. 불타는 태양 아래 서늘함이란 조금도 없다. 땀이 비오 듯 한다. 함백산을 지날 땐 불에 달궈진 양철판 위를 걷는 듯하다. 해는 중천에서 무자비하게 열기를 쏘아댄다. 마침내 항복. 산행을 멈추고 낮잠 을 자기로 했다. 하지만 잠을 청하려 해도 땀이 너무 나 잘 수가 없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더위가 한풀 꺾인다. 숨이 턱턱 막히지 않는 게 한 결 걷기가 낫다. 노을이 들 무렵 매봉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 진 고랭지 채소밭. 배추에 감동해 보기는 또 처음이다. 채소밭 주인이 쉬 었다 가란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몸을 씻고 배추김치를 척척 얹어가며 밥을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주인은 냉기서린 맥주까지 내준다.
오늘은 기필코 댓재까지 가리라. 산골 인심을 뒤로 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흐리다. 걷기에는 오히려 좋은 날씨 다. 피재에 오르자 모기떼가 사정없이 공격을 해온다. 벌떼와 다름없다. 손으로 쳐 잡은 모기가 백여마리다. 두 손이 새빨갛다. 한의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출발하려는데 으악! 이번에는 독사다. 사람 무서운 줄 모 르고 길을 가로막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돌을 던져도 막대기를 휘둘 러도 소용없다. 똬리를 틀고서 되레 쏘아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결 국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독사를 피하니 소나기가 뿌린다. 한참 더울 땐 소나기라도 내리면 좋겠다고 했지만 반갑지가 않다. 지친 몸에 비까지 맞 으니 기진맥진이다. 천신만고 끝에 댓재에 도착했으나 칠흑같은 어둠 때 문에 샘을 찾을 수 없다. 최악의 날이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이 처연하 기만 하다. 집이 그립고 가족이 그립다.
깨자마자 계곡을 찾았다. 물맛이 그만이다. 발을 담그고 한없이 머무르고 싶다. 그러나 두타산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3시간짜리 오르막길이다. 길 은 좋은 편인데 더위는 어쩔 수 없다. 협곡이라 바람 한점 없다. 손으로 세수하듯 땀을 떨궈낸다. 태양이 여기만 비추는 것 같다. 경묵이는 몽유 병 환자처럼 넋을 잃고 걷는다. 정상에 섰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아 무래도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 겨우 물을 찾 아 마셨다. 라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낮잠을 청했다. 일어나 청옥산 으로 향하는데 둘 다 걸음이 갈짓자다. 정상에 텐트를 치고 그대로 쓰러 졌다.
석회석 광산에 능선이 잘린 자병산
아침부터 폭염이다. 경묵이는 여전히 힘이 없다. 힘들게 원방재에 도착했 다. 일정이 늦어졌지만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오후 1시에서 3시 까지 계곡에서 쉬었다. 아무래도 토요일까지 대관령에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운행에 대해 토의를 했다. 걷는 데까지 걸어보자고 다짐했 지만 자신이 안 선다. 다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강박관념만이 꿈틀 댈 뿐이었다. 더위를 뚫고 백복령에 도착했다. 옆에서 등산객들이 고기를 구워먹다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음식을 내준다. 고맙게 받아 먹었다. 이제 지원일까지 하루가 남았다. 벌써 반나절 이상 뒤처져 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무거운 마음으로 억지로 잠을 청했다.
경묵이를 차에 태워 삽답령으로 보내고 혼자 걷는다. 석회석 광산으로 능 선이 잘려나간 자병산에선 길이 없어져 한동안 고생을 했다. 혼자서 수풀 을 헤치며 괜히 울고 말았다. 무릎께에서 엉키는 거친 잡목들이 설움을 북돋운다. 수없이 파헤쳐진 군사참호가 어릿어릿 눈에 들어온다. 작년 무 장잠수함 침투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은 목줄기가 잘리고, 나는 동료 와 헤어지고, 홀로 걷는 산길은 온통 곰보투성이고. 도무지 그 처연함을 참을 수가 없다. 경묵이와 만나기로 한 삽답령에 도착해서는 기진맥진해 결국 나머지 구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지만 능력을 벗어난 일 이다. 차를 타고 대관령으로 가는데 둘 다 말이 없다. 지원조를 만났지만 기뻐하기도 뭐하다. 지원은 이제 이것으로 끝이니.
7월28일 오전 6시30분. 하루를 쉬었지만 더 피곤하다. 지칠대로 지친 몸 이지만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억지로 힘을 짜낸다. 출 발할 땐 하늘이 흐리더니 곧 맑아진다. 대관령부터 소황병산까지 삼양목 장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곳에도 역시 한국통신 기지가 있어 산을 돌아 야 했다. 왜 이리 백두대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많은지. 군부대, 한국통신기지, 그리고 광산. 상처입은 백두대간이 안쓰럽기만 하다. 선자 령에 다다르니 푸른 동해바다가 보인다. 햇살을 받아 더 밝은 빛을 되쏜 다. 배낭을 벗고 동해바다의 황금빛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노인봉을 거쳐 진고개에 올라 내친김에 동대산까지 넘었다. 산이 깊어 짐승이 많다는 이 곳도 곳곳에 상처다. 참호와 약초를 캔 흔적들. 산행의 끝이 가까워지면 서 그 끝모습이 개운치 않아 속이 쓰리다.
황금빛 동해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침 일찍 두로봉에 올랐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났다. 방학과 휴가를 맞아 백두대간을 달리는 이들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데 사 람내음이 정겹기만 하다. 신배령을 지나 만월봉, 응복산을 연거푸 넘는데 발걸음이 가볍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 구룡 산 휴게소에서 어울려 감자술로 목을 축였다. 한잔 한잔 돌아가는 술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북적북적한 시간.
아침밥을 지어 먹고 느긋이 출발한다. 빠르게 전진! 쇠나드리 아래 샘터 에서 끓여먹은 라면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커피 한잔의 여유. 낮잠을 자 려고 누우니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아름답다. 계곡에서 올라오는 바람은 그지없이 상쾌하고. 시인의 마을처럼 나직이 눌러앉은 산마을을 굽어보며 능선을 달린다. 그런데 너무 여유를 부렸나보다. 조침령 지나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30분간 온 길을 되돌아갔다. 수많은 참호들과 군 인이동로 때문에 길이 너무 많아진 탓이다. 표식기도 모두 배어버린 듯하 다. 독도에 주의하면서 강행군. 하지만 결국 야간산행이다. 밤 10시가 다 돼서야 북암령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는다. 아! 꿀맛.
새벽같이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간에 느릿느릿 숟가락을 뜬다. 완만한 능 선에 굴곡이 많아 지겨운 줄을 모르고 빠르게 걷는다. 계곡이 바로 옆으 로 흐르는 단목령을 지나 점봉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이 제 이틀만 더 가면 된다는 느낌 때문일 게다. 땀에 젖은 옷을 손으로 짜 내가며 오르막길을 내닫는다. 마침내 한계령. 괜히 눈물이 나온다. 그간 고생을 많이 하긴 했나 보다. 40일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휴 가철이라 한계령은 사람으로 붐빈다. 사람구경을 하니 다시금 집이 그리 워진다.
산행을 끝낼 내일을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설악을 오른다. 주위의 기 암괴석이 보이는 곳마다 장관이다. 끝청에 올라서 우뚝 솟아 있는 대청봉 을 맞이 하니 가슴이 뭉클하다. 지리산에서 천왕봉을 출발점으로 걸어온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대청봉이 바로 코앞이라니. 중청 산장에서 점심을 먹으며 대청봉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샘터가 있는데도 폐쇄해 버리고 비 싼 값에 물을 파는 산장이 얄밉다. 다시 마등령을 향해 출발한다. 오르락 내리락이 계속되면서 사방에 펼쳐진 장관에 눈이 부시다. 그때 저 멀리서 울려오는 천둥소리. 좀 있으니 꾸역꾸역 안개가 밀려온다. 텐트를 치자마 자 우박같은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마침내 갈 수 없는 대간의 끝에 서다
마지막날 아침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성스레 밥을 짓고 찌개를 끓였 다. 백두대간 종주의 종착점을 찾아가는 흥분을 반찬삼아 열심히 먹었다. 날씨가 끝까지 성을 부린다. 어젯밤부터 심상치 않던 날씨가 아침에도 짙 은 안개와 강풍으로 이어졌다. 너덜지대를 내려가는데 심한 강풍으로 몸 이 빨래처럼 휘청거린다. 짙은 안개로 길을 잃었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진부령을 향해 마음은 달려가고만 있는데, 강풍과 안개, 지긋지긋한 바위 들이 몸을 막아선다. 문득 꼴을 보니 가관이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옷은 땟국물이 뚝뚝 듣는다. 등산화는 밑창이 너덜너덜하고. 빨치산의 모습이 이랬을까. 저항령을 지나 미시령을 거쳐 신선봉을 넘었다. 이제 대간령에 서 진부령까지 가는 길만 남았다. 지도로 불과 7km. 7시간 정도면 그 끝 에 설 것이다. 마산을 지나 흘리국교까지 느릿느릿 걸었다. 바람 한점,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도 다 기억하고 싶다. 발걸음을 뗄수록 진부령이 그만큼 멀어졌으면 좋겠다. 북녘의 백두대간을 앞에 두고 돌아서야 할 순 간이 두렵다. 아! 지금 우리가 백두산을 오르고 있다면. 진부령은 그러나 말이 없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