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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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리를 내리달려온 백두대간이 남해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 뚝 서버린 곳, 그곳에 지리산은 있다. 6월23일 오후 7시10분, 그 남쪽 산 자락을 타고오르는 것으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저 멀리 아득히 이 어지는 산들이 파랗게 깨어나는 시간이다. 천왕봉 아래 중산리에 닿았을 때는 이미 붉은 해가 숨을 깔딱이고 있었다. 야간산행을 작정하고 천왕샘 으로 향했다. 선홍빛 노을은 어느새 사라지고 희뿌연 안개가 허리에 감긴 다. 랜턴불빛에 초점을 맞추고 걷노라니 어느새 정상. 구름은 저만치 아 래에 있고, 세상은 온통 달빛 별빛 천지다.
이튿날 새벽부터 비가 퍼붓는다. 강풍에 실려 쏟아지는 빗방울이 텐트를 날려버릴 듯 하다. 아침 내내 텐트에 갇혀 라디오를 벗삼았다. 6·25였다 .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온다. 6·25, 지리산, 빨치산… 덧없는 연상이 이 어진다. 오후 늦게야 성삼재, 비와 짙은 안개로 시야가 형편없다. 표식기 에 의존해 걷다 길을 잃고 2시간 동안 헤맸다. 만복대를 지나 정명치에 도착하니 몸이 파김치다.
연일 폭우다. 일정에 맞추려면 무조건 열심히 걷는 수 밖에 없다. 고남산 을 지나는데 한국통신기지가 우뚝 서 있다. 능선을 가로막고 선 기지 때 문에 길이 끊겼다.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88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고 모래재 주변의 산을 넘었다. 산불이 났는지 꼴이 말이 아니다. 진종일 걸 었지만 예정보다 7시간30분이나 뒤쳐졌다. 만회가 가능할지 자신이 안 선 다. 가는 데까지 가볼 수 밖에.
나흘 만에 비가 그쳤다. 선잠을 깨고 새벽 3시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육십령에서 1차 지원조를 만나야 한다. 신발이 젖어 발가락은 온통 물집 이 잡혔다. 월경산을 지나 다시 길을 잃었다. 일단 계곡으로 탈출했으나 능선은 숨바꼭질하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마침 얼굴을 드러낸 태 양은 이제 바늘같은 땡볕을 쏘아댄다. 눈물을 머금고 마을로 탈출. 낙오 다. 땅바닥에 눌러 앉아 지원조를 기다리는 심졍이 착잡하기만 하다.
6월30일 오전 5시20분. 덕유산으로 향한다. 하늘엔 구름 몇점이 한가로이 떠돌고 바람이 불어 쾌적하다. 인적은 간데 없다. 경사가 급하고 길이 좁 은 탓인가. 동엽령에 도착해 샘터 옆에 텐트를 쳤다. 산은 침묵의 바다다 . 이름모를 새들의 울음이 심사를 흔든다. 밤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눈꺼 풀이 무겁다. 걱정이 얹힌다.
향적봉 갈림길에서 탈진한 경묵이가 아예 드러눕는다. 내장이 8자매듭으 로 꼬인 것 같단다. 산장으로 탈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과 짙은 안개에 길을 잃고 말았다. 일단 오수자굴에 텐트를 쳤 다. 버너불로 추위에 뻣뻣해진 몸을 녹였다. 빗발이 가늘어져 마을로 퇴 각. 삼도봉까지는 버스를 타야겠다.
추적추적이던 비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몸은 물에 젖은 솜같다. 안개가 끼지 않아 다행히 지도는 볼 수 있다. 길도 그런대로 좋고. 질마재에 다 다를 즈음엔 비도 그쳤다. 느긋이 걸어 바람재에 올랐다. 쌩쌩 부는 바람 이 눈썹까지 흔든다. 낮게 깔린 먹구름 위에 노을이 깔렸다. 온 하늘이 검붉다.
경묵이를 차에 태워 보내고 혼자 걷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단독산 행이다.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그리고 약간의 무서움. 추풍령에 닿으니 벌써 한밤이다. 두엄더미 옆에서 모기와 싸우며 잠을 청한다. 외롭다. 다 음날 아침부터 발걸음을 서둘렀다. 또 비를 만났다. 국수봉에 닿으니 경 묵이가 웃고 서 있다. 내리막길을 따라 2차 지원장소인 큰재에 도착했다. 이제사 겨우 백두대간의 첫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어깨가 괜시리 늘어진 다. 7월7일 오전 8시30분. 산행이 버거워진 걸까. 온몸이 나른해진다. 뼈 마디마디 나사가 풀린 것같다.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아 길까지 놓쳤다. 어느덧 표식기도 보이지 않는다. 무작정 앞으로 나아간다. 다 팽개치고 휭 하니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
의욕이 없기는 이튿날도 마찬가지. 오전 6시에 눈을 떴지만 몸이 일어나 질 않는다. 낮은 야산으로 이어지지만 거미줄 투성이다. 몸을 털면 수없 이 많은 곤충들이 거미줄과 함께 떨어진다. 신의티 고개는 완전 모기밭이 다. 이젠 모기에 물려도 무감각하다. 겨우 백학산을 지났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고 화들짝 놀라 깼다.
새벽부터 발걸음을 서둘렀다. 거미줄 때문에 머리를 숙인 채 땅만 보고 걷다가 길을 잃었다. 다시 제길을 찾았지만 1시간30분이나 허비했다. 정 오 무렵 신풍리 고개에 도착했다. 비가 그치니 이번엔 땡볕이 괴롭힌다. 그늘에서 기온이 낮아질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장자동 고개에 도착하니 경묵이가 또 꼼짝달싹도 못한다. 이번 주는 계속 고난의 연속이다.
약을 사먹어야겠다는 경묵이를 눌재에서 만나기로 하고 출발했다. 아침부 터 푹푹 찌는 더위로 발걸음이 더디다. 몸은 무겁고 목이 바짝바짝 탄다. 겨우 속리산 천황봉에 올랐다. 오랜만에 등산객을 만나니 기쁘다. 문장대 에서 내리막길을 타다 또 길을 잃어버렸다. 자꾸만 계곡으로 빠져든다. 기를 쓰고 능선으로 붙어보려 했지만 능선은 신기루처럼 멀어져만간다. 또 아침부터 비. 회양산 오르막이 까마득하다. 발걸음을 떼자 마자 온몸 이 비에 젖는다. 쉴 때마다 한시간, 두시간, 남은 시간을 손가락으로 꼽 으며 한숨을 쉰다. 회양산 오르는 길은 온통 바위투성이여서 기다시피 한 다. 해질 무렵 백화산을 지나서야 완만한 능선이 나타났다. 랜턴을 켜고 이화령에 닿으니 한밤중이다.
7월14일 오전 6시40분. 하늘이 무겁다. 안개만 없었다면 경치가 그만일텐 데. 정오께 조령3관문에 도착. 근처 주막집에서 대금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오후엔 살인적인 무더위. 온통 땀 범벅이다. 마역봉을 지나 부봉까 지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진을 쪽 빼는 지형이다. 하늘재에 오르니 민가 한채가 외롭게 고개를 지킨다.
오늘은 지금까지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 지도상으로만 25km. 다행 히 날씨가 산행하기에 안성마춤이다. 간간이 햇빛이 나오고 시원한 바람 까지 불어준다. 묘적령까지는 가끔 잡목지대가 나오더니 소백산 국립공원 에 들어선다. 산중 대로다. 해질녘 죽령에 도착. 국립천문대까지 도로 따 라 걷는다. 제2연화봉 한국통신기지 앞 식수대 옆에서 텐트를 쳤다. 모기 가 없다. 좀 추운것 말고는 환상적인 잠자리다.
아침 하늘엔 구름 한점없다. 또 푹푹 찌겠군. 다행히 제1연화봉부터 구름 이 적당히 해를 가려주고 바람이 간간이 불어준다. 비로봉을 거쳐 국망봉 까지 오르막이다. 그 오르막에 물통마저 무겁기다. 마당치와 고치령을 거 쳐 오후 8시께 마구령에 도착하니 달빛이 환하다. 이렇게 빛나는 달은 난 생 처음이다.
새벽부터 복통과 설사. 겨우 일어나 약기운에 의지해 오전 9시께 출발했 다.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고통이 심하다. 무더위에 하늘이 어질어질 현기증까지 난다. 쓰러질듯 말듯 오후 5시 박달령. 늦은 점심에 설사약과 진통제로 몸을 추스린다. 옥돌봉을 지나서 내리막길인 도래기재까지 전력 질주했다. 저만치 지원조가 보인다. 살았다!
7월21일 오전 7시30분. 몸살 탓인지 아침까지 비몽사몽이다. 설상가상으 로 뙤약볕이다. 연신 땀방울을 훔쳐보지만 헛수고다. 구룡산을 지나서는 불도저로 능선을 밀어 버렸는지 볕이 그대로 머리에 내리꽂힌다. 그래도 태백산은 위풍당당하다. “수고했다. 내가 진부령까지 데려다 주마. 어서 구름 위로 올라 타거라아!” 산신령을 만나는 꿈을 꿔본다.
눈을 뜨자마자 햇살이 따갑다. 오늘은 얼마나 더울지. 함백산을 지날 땐 불에 달궈진 양철판 위를 걷는 듯하다. 해는 중천에서 무자비하게 열기를 쏘아댄다. 마침내 항복. 낮잠을 청해도 땀 때문에 허사다. 오후 5시가 넘 어서야 더위가 한풀 꺾인다. 노을 질 무렵 매봉산이 다가선다. 끝없이 펼 쳐진 고냉지 채소밭. 싱싱하게 자라는 배추에 그만 감동.
오늘은 기필코 댓재까지 가리라.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흐리다. 그 러나 걷기엔 오히려 좋다. 피재에 오르자 모기떼 공습이다. 손으로 쳐 잡 은 모기가 백여마리다. 두 손이 새빨갛다. 한의령을 지나니 소나기가 뿌 린다. 비는 끝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다시 기진맥진. 댓재에 도 착했으나 칠흑같은 어둠 때문에 샘을 찾을 수 없다.
깨자마자 계곡을 찾았다. 물맛이 그만이다. 발을 담그고 한없이 머무르고 싶다. 그러나 두타산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3시간짜리 오르막길이다. 길 은 좋지만 더위엔 어쩔 수 없다. 협곡이라 바람 한점 없다. 세수하듯 땀 을 씻어낸다. 경묵이는 몽유병 환자처럼 넋을 잃고 걷는다.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다. 청옥산으로 향하는데 둘 다 걸음이 갈짓자다. 정상에 텐트 를 치고 그대로 쓰러졌다.
석회석 광산으로 능선이 잘려나간 자병산에선 길이 없어졌다. 참호가 수 도 없이 이어진다. 지난해 무장잠수함 침투 때 파헤쳐졌다고 한다. 그러 나 분개하기엔 너무 지쳤다. 삽답령에 도착해서는 그대로 늘어진다. 나머 지 구간을 포기했다. 차를 탔다. 대관령으로 가는 동안 둘 다 말이 없다. 지원조를 만났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다.
7월28일 오전 6시30분. 출발할 땐 하늘이 흐리더니 곧 맑아진다. 대관령 부터 소황병산까지 삼양목장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곳에도 역시 한국통 신 기지가 있어 산을 돌아야 했다. 백두대간엔 왜 그리 장애물이 많은지. 군부대, 한국통신기지, 그리고 광산. 상처투성이의 백두대간이 안쓰럽기 만 하다. 선자령에 다다르니 푸른 동해가 한눈에 안긴다. 햇살을 받아 황 금빛을 되쏜다. 노인봉을 거쳐 진고개에 올라 내친 김에 동대산까지 넘었 다. 이곳도 곳곳에 상처다. 참호와 또 참호.
내일을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설악을 오른다. 내일로 산행은 끝이다. 주위의 기암괴석이 하나같이 장관이다. 우뚝 솟은 대청봉이 저 앞에 있다 . 가슴이 뭉클하다. 지리산에서 천왕봉을 출발점으로 걸어온 게 바로 엊 그제 같은데…. 오르락 내리락이 계속되면서 사방에 펼쳐진 비경에 눈 부 시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다가온다. 꾸역꾸역 안개도 밀려온다. 그러나 마음은 가볍다.
마지막날 아침이다. 날씨가 끝까지 성을 부린다. 어젯밤부터 심상치 않던 날씨가 아침에도 짙은 안개와 강풍으로 이어진다. 너덜지대를 내려가는데 심한 강풍으로 몸이 빨래처럼 휘청거린다. 짙은 안개로 길을 잃었다가 다 시 되돌아오길 몇차례. 저항령을 지나 미시령을 거쳐 신선봉을 넘었다. 이제 대간령에서 진부령까지 가는 길만 남았다. 지도로 불과 7km. 어림잡 아 7시간 뒤면 남녘 백두대간의 북쪽 끝에 선다. 마침내 진부령.
휴전선 너머로 백두대간은 아득히 이어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 곳에 멈춰 야 한다. 가고싶다. 백두산까지.
박진우/ 숭실대 산악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