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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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처참하게 구겨진 대한항공 801. 항공사고의 각종 통계치는 항공 선진국으로 도약을 다짐하는 우리로 하여금 얼굴을 쳐들 수 없게 한다.)
세계 10위권의 항공시장 규모, 국적 항공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1백68대의 비행기, 취항 28년 만에 국제선 화물 및 여객 수송실적 각각 세계 3위와 13위에 올라 있는 대한항공. 우리 항공업계와 항공사들의 고속성장을 보 여주는 수치들이다.
조종사 부족문제,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모습 뒤에는 ‘항공사고 다발국(多發國)’이라는 어 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항공사고와 관련된 각종 통계치는 21세기 항 공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다짐하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얼굴을 쳐들 수 어 렵게 한다. 1억인㎞당 사망사고 건수는 0.06회로 세계평균치 0.04회의 1. 5배다. 10만시간 비행당 사망사고 건수(0.14회)와 1억비행㎞당 사망사고 건수(0.24회)도 세계평균의 1.4배 수준이다(도표 참조). 지난 70년 이후 8백여명에 이르고 있는 국적 항공기 사고 사망자수는 이런 통계치의 결과 물이다. 도대체 우리 항공사고 관련 수치들이 세계평균에 비해 50%나 높 은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8월6일 새벽 2백26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 801편 괌 추 락사고는 ‘항공사고 1.5배의 미스터리’에 대한 의혹을 한층 높이고 있 다. 한미 합동조사를 통해 기상악화, 기체결함, 할공각 유도장치(글라이 드 슬로프) 같은 공항시설 고장, 최저 안전고도 경보장치(MSAW) 등 관제 시스템 결함, 관제사나 조종사의 실수 등 각종 요인들이 괌 추락사고의 직간접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이 미스 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인 배경을 규명하는 것이 화급하다.
지난 80년 이후 사망자가 발생하거나 기체가 파손된 국적 항공기들의 주 요 대형사고를 살펴보면 지난 87년 11월 김현희 등 북한공작원에 의해 버 마 안다만 해상에서 공중폭발한 대한항공 B707 폭파사건을 제외하고는 사 고원인이 대부분 ‘조종과실’로 돼 있다(표 참조). 고의사고를 뺀 나머 지 일반사고는 거의 조종사 실수로 인한 ‘인재’였던 셈이다. 조종사의 근무여건은 지난 88년 제2민항기인 아시아나 출범을 계기로 계속 악화돼 왔다. 전두환 정권 최후의 대형 이권사업이라는 항간의 의혹에도 제2민항 출범은 급속도로 늘어나는 항공수요에 대처하고 경쟁체제 도입을 통해 서 비스 등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처였다. 그러나 정부는 필연 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었던 조종사 부족 문제에 대해 아무런 사전대책 을 세우지 않았다. 대한항공의 한 간부는 “외국인 조종사를 대규모로 도 입했지만 조종사들 사이에선 자신들이 혹사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높다” 고 말한다. 특히 항공사들이 운항 편수를 평소보다 대폭 늘리는 여름 성 수기에는 조종사들의 피로누적으로 사고위험성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 다. 경력이 충분치 않은 조종사들 투입, 외국인과 내국인 조종사간의 의 사소통 불편으로 인한 사고위험도 결국 조종사 부족이 초래한 요인들이다 .
블랙박스, 우리는 왜 분석 못하나
그러나 항공사고에서 조종과실이 차지하는 비율이 세계적으로는 50∼60% 를 차지하는 점을 감안할 때 사고원인을 조종과실로만 몰아붙이는 것은 석연치 않다. 미국 보잉사가 지난 59년부터 95년까지 36년간 발생한 세계 민간항공기 사고 1천여건을 분석한 결과 사고원인이 기장 등 운항승무원 의 과실인 경우는 55.8%로 나타났다. 나머지는 항공기 자체결함 13.6%, 기상과 공항·관제탑 과실 4.1%, 항공기 정비결함 2.9% 등의 순이었다. 항공전문가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해답을 비행경로기록장치(DEDR)와 조종실 음성녹음장치(CVR)로 구성된 블랙박스 분석을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리의 사고조사 실태에서 찾는다. 우리나라는 지난 4월 김포공항에 항공 사고 자료분석실을 설치해 블랙박스 해독장비를 들여놓기 전까지는 자체 조사를 못하고 모두 미국 등 다른 나라에 맡겨왔다. 교통개발연구원의 김 종석 항공실장은 “기체결함을 우려한 항공기 제작사(그들 대부분은 미국 )와 사고 관련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미묘한 문제를 외국인들이 맡다 보 니 사고원인이 아무래도 조종사 과실쪽으로 결론내려지는 경향이 높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번 괌 사고 조사에서 한미간에 사고원인을 둘러 싸고 벌어지는 신경전은 그 좋은 실례다.
국적 항공기들이 정비소홀로 출발시간이 늦어지거나 아예 비행기를 결항 시키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는 점도 조종과실로만 몰아붙일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국내선의 경우 대한항공의 지연율은 95년 3.8%, 96년 4.7 %, 올 상반기 6.6%로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시아나도 대한항공 보다 낮기는 하지만 95년 4%, 96년 4.3%, 올 상반기 4.7%로 높아지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나라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는 30여개 항공사(대한 항공과 아시아나도 포함) 전체의 올 상반기 지연율 3.5%에 비해 훨씬 높 은 수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올 상반기 결항률도 각각 4%, 3%로 국 제선 항공사들(0.6%)의 5∼7배에 이른다. 항공기 정비는 규정해 따라 철 저히 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항공사들의 주장을 무색 케 하는 대목이다. 항공전문가들은 항공사들이 규정대로 정비를 실시하고 부품을 수명에 맞춰 교체하더라도 무리한 운항이 반복돼 기계에 만성적 피로가 쌓이게 되면 사고위험성이 한층 높아진다고 말한다. 또 항공사고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원인에 의해 일어나기보다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 으로 작용하는 ‘체인식 원인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항공기 노후와 피 로누적, 형식적인 정비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요소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항공사고 ‘몸값’ 너무 싸다
항공전문가들은 우리 항공업계가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승객안 전과 서비스 제고라는 질적 측면에서는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복수 민항시대에 접어든 지 9년째를 맞고 있지만 국내 항공사들은 영업실적을 늘리기 위해 증편과 대체투입, 릴레이식 운항 등 무리한 운항을 마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은 서비스와 가격을 통한 본질적 경쟁보다는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견제와 반목을 일삼는 모습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두 항공사들이 신규 국제노선 배분, 국내선 항공운임 인하 등을 둘러싸고 벌 인 소모전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선발업체인 대한항공은 장비 공동사용이나 판매영업 등 각종 업무제휴, 공항시설 이용 등에서 아시아 나에 대해 적대적 태도로 일관해 빈축을 사왔다.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적 항공사간의 이런 공조체제 부재가 현실적으로 불필요한 비용발생 을 야기하므로써 더욱 중요한 안전과 서비스 관련 투자를 제약하는 요인 으로 작용해 사고위험을 더욱 부채질한다”고 말했다. 항공사고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몸값’이 너무 싼 것도 항공사들이 안전투자를 게을리하 는 큰 요인이라는 지적도 많다. 항공사로서는 사고로 인한 배상이나 보상 , 보험료 추가부담이 안전을 위한 투자보다 적을 때 돈으로 때우려는 경 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공당국도 ‘1.5배 미스터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미 지적됐지만 블랙박스 해독 등 항공사고 조사능력 결여는 곧바로 ‘사고원 인 규명→원인 치유→사고 예방’이라는 피드백을 불가능케 한다. 정확한 원인규명 없이 조종과실로 치부해버릴 경우 사고예방은 불가능하다. 이는 곧 우리 항공당국의 항공안전 투자 부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항공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블랙박스 해독장비 도입 외에도 각종 보안시설 개량 및 신규도입, 항공관련 인력 교육 등에 막대한 투자가 요구된다. 건 설교통부는 지난해 항공보안시설에 2백80억원을 투자한 데 이어 올해 다 시 2백56억원의 예산을 책정했지만 계기착륙장치(ILS)가 설치된 공항이 김포 등 4개에 불과한 데서 드러나듯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조종사 , 정비사, 관제사 등 항공 관련 인력에 대한 정부투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건교부의 한 관계자는 “조종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9 0년 2백35억원을 들여 설립하기로 한 국립비행학교 설립도 예산부족 등으 로 백지화됐다”면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이 갈수록 항공사고에 서 인적요소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교육문제를 강조하고 있지만 거의 손 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항공사고 조사기관 설립 급하다
괌 추락사고 조사를 벌이고 있는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와 같은 전 문적인 항공사고 조사기관 설립도 시급한 과제다. 지난 93년 7월 66명의 생명을 앗아간 아시아나 목포공항 추락사고 이후 전문적인 항공사고 조사 기관 설립 문제가 거론됐지만 결국 흐지부지돼 버렸다. 사고가 나면 건교 부 항공국 항공기술과 소속의 조사요원 1∼2명이 중심이 돼 사고조사반을 급조하는 임시변통식 대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항공전문가 들은 “우리는 항공 규제당국과 조사당국이 동일한 주체여서 설령 사고원 인에 정비소홀과 같은 규제상의 실수가 있더라도 책임추궁이 두려워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있다”면서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조사기관 설립이 시 급하다고 주장한다.
우리 항공승객들의 의식수준도 항공사고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행기가 안전상의 문제로 회항하거나 다른 공항에 내릴 때 승객들이 항 의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는 지적까지 있다. 비용과 시간 의 추가부담을 꺼려 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삼는 후진적 항공문화가 사 라지지 않는 한 항공사고 다발국의 불명예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