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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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행을 하면 할수록 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괌에 추락한 대한항공 801편의 사고원인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 공방이 계속되면서 민항기 조종사의 실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승객의 생명을 손에 쥐고 있는 ‘조종사들의 현실’은 곧 사고를 가늠 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쪽은 “조종사 관리는 법규정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며 조종 사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조종사들 이나 항공전문가들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단순히 법규정을 지킨다고 모든 게 끝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조종사들의 현실’은 그렇게 자 신하기엔 너무나 많은 허점들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1백50명 부족… ‘기장 되기 쉬워졌다’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조종사 부족이다. 한국항공진흥협회에 따르면 97년 7월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두 국적 항공사에 소 속된 조종사들은 모두 1천9백23명. 대한항공에 1천3백33명, 아시아나에 5 백90명이 취업해 있다. 하지만 올해 양대 항공사의 예상 필요인원은 모두 2천73명이다. 1백50명이 충원돼야 하는 셈이다. 비행을 실질적으로 책임 지는 기장의 인력난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항공대학교 항공운항학과 은희 봉 교수는 “자체 양성 수단없이 군출신으로 대부분 조달해온 항공업계는 88년 아시아나 등장 뒤 만성적인 조종사 부족에 시달려 왔다”며 “양성 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장을 구하기란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때문에 항공사는 나름대도 돌파구를 찾고 있다. 89년부터 외국인 조종사들을 대 규모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항공 소속 기장 6백58명 가운데 1 백67명, 아시아나 2백90명의 기장 가운데 40%인 1백16명이 외국인이다. 또 대학졸업자를 선발해 조종사로 길러내는 조종훈련생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조종사 부족을 단기간에 해결하려는 이런 시도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자질 문제가 도마에 오른 다. 현재 조종사가 되는 길은 국내교육 3개월과 미국 등 외국 비행연수 9 개월을 통해 상업용 면허와 계기비행 면허를 획득한 뒤 다시 국내 제트기 종 훈련 10개월을 마치고서야 부기장으로 채용된다. 군출신은 10개월의 기본교육과 3개월의 비행훈련만 마치면 부기장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비행시간은 평균 3백∼5백시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미 국의 경우 신참 부기장의 비행시간이 보통 1천5백에서 3천시간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기장이 되는 것도 과거보다 쉬워졌다. 현재 비행경험 3천시간 이상이거나 민항경력 3년 이상이면 중형기의 기장이 될 수 있다. 공군 조종사출신은 평균 5년, 민간인출신은 평균 7년이면 기장이 될 수 있는 셈이다. 미국 등에서는 10년 이상 비행경험을 쌓고도 선임 기장이 그만둬야만 기장이 될 수 있어 기장은 조종사들의 평생 꿈으로 여겨지는 것에 비춰보면 ‘누 워서 떡먹기’다. 더욱이 외국인 조종사를 무더기로 채용하고도 조종사 부족을 메우기 어려워지자 92년 1월 당시 교통부는 기장 자격을 비행경력 5천시간 이상에서 3천시간 이상으로 크게 낮췄다. 조종사 부족은 곧바로 조종사들의 격무로 이어진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대한항공 조종사는 연 평균 5백88시간(94년 기준), 아시아나 5백8시간 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 다. 이는 미국에서 총비행시간 1, 2위를 달리는 아메리칸항공의 4백57시 간이나 델타항공의 3백95시간보다 훨씬 많다. 세계 20대 항공사 가운데 2 위와 5위를 차지하는 비행량이다.
“두배로 일하고 월급은 반밖에…”
갈수록 비행시간은 더욱 늘고 있다. “한국 조종사들은 현재 연평균 국내 선 8백시간, 국제선 7백시간을 탄다”는 게 조종사들의 말이다. 대한항공 의 한 국제선 조종사는 “미국에서 조종사 교육을 받을 때 노스웨스트 등 은 한달에 3번 이상 태평양을 건너지 못하게 한다고 배웠는데 우리는 한 달에 6∼7번씩 태평양을 건넌다”고 전했다. 항공법규상 국제선 왕복을 마치면 승무시간의 두배 이상 휴식을 취하도록 돼 있지만 3박4일짜리 비 행 뒤 40여시간 만에 4박5일짜리 비행을 떠나야 한다는 그는 “두배 일하 고 월급은 반밖에 못받는 게 한국 조종사의 현실”이라고 분노했다.
조종사들은 피곤하다. 아시아나의 한 조종사는 “피로가 누적되고 조금 무리가 간다”고 말한다. 더욱이 성수기인 12∼1월, 7∼8월은 조종사들에 게 고통스런 시간이다. 항공사들의 무리한 증편으로 조종사들은 제대로 휴식하지 못한 채 비행기에 또 몸을 실어야 한다. 조종사들은 “한달에 평균 65∼70시간을 비행하는데 이 기간에는 평균 10시간 정도씩 늘어난다 ”고 전한다.
국내선도 사정은 마찬가지. 연평균 비행시간이 국제선보다 1백시간 정도 긴 이들에게 공항적체는 더욱 괴롭다. 도착 뒤 재이륙까지 보통 30분의 여유가 주어지는데 10여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게 일반화돼 있어 제대로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다는 것이다. 아시아나항공의 한 조종사는 “비행 기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다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또 특 정노선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체계가 없는 우리의 비행관행도 조종사들 에게는 큰 부담이다. 조종사들에 따르면 “위험 공항으로 분류된 곳에 고 참을 보내는 원칙을 제외하면 현재 비행은 그때그때 스케줄에 따라 조종 사를 정하고 있다”고 전한다. “기장과 부기장이 서로 이름을 모르는 경 우도 많다”는 한 조종사의 말은 충격적이다.
여기에 조종사들을 괴롭히는 항공사의 수많은 관행들까지 겹쳐 있다. 먼 저 한국적인 조종실 문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은 부기장은 위험이 있다고 판단할 때 기장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상호협조만이 사고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부기장 이 기장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례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아시 아나의 한 부기장은 “기장에게 문제제기하면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 아들인다”며 특히 “자신과 관계가 안 좋은 기장과 비행할 때는 심리적 위축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고백한다.
또한 외국인 조종사들과 국내 조종사들 사이엔 감정적 마찰도 적지 않다. 월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외국인 조종사들은 우리 조종사에 대해 우월감 을 갖고 대한다. 신참 기장을 기준으로 할 때 경력에 따라 내국인 기장들 은 5천2백만∼7천만원을 받는 데 비해 비슷한 경력의 외국인 기장들은 평 균 30% 정도 높은 임금을 받는다. 특히 미주나 유럽 출신 기장들은 내국 인 기장의 2배에 가까운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전세아파트 등의 편의를 제공받고 휴식과 회항 등에서도 이들에게만은 규정이 그대로 적용 된다.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함께 이런 감정적 앙금은 비행에 치명적인 영 향을 미친다. 실제 지난 94년 8월10일 제주공항에서 폭발사고를 일으킨 대한항공기의 경우 캐나다 출신 기장의 착륙 결정에 한국인 부기장이 불 응해 재이륙을 시도하다 일어났다. 회항했을 경우 느끼는 중압감도 조종 사들의 안전운항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항공사의 이미지 손상과 승객의 숙박비 부담 등으로 조종사들은 회항을 기피하고 무리한 착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조종사는 “공식적인 불이익은 없지만 중압감을 느낀다”며 “관제탑에서 확실하게 착륙 불가 판정을 내리는 경우를 제외 하고는 무리를 느껴도 일단 착륙을 강행한다”고 말한다.
군출신들의 위험한 ‘군인정신’
관제사들의 태도도 조종사들에겐 큰 심리적 압박요인이다. 조종사들에 따 르면 국내 관제탑의 경우 “다시 말해달라”는 조종사들의 요구에 싫은 소리를 하기 일쑤이고 “내려서 전화하라”는 등 권위적인 자세를 보인다 는 것이다. 때문에 잘못 알아듣거나 착각하는 경우 대부분 이전 경험에 따라 착륙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일부 군출신 조종사들에게 남아 있는 ‘군인정신’도 위험요소로 지적된 다. 국내 조종사의 90%를 차지하는 이들 가운데는 비행을 일종의 임무로 판단해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93년 7월 목포공 항에서 추락한 아시아나항공기의 경우 악천후로 착륙이 불가능함에도 세 차례나 착륙을 시도하다 사고를 당했고, 89년 7월 리비아의 트리폴리공항 에서도 대한항공기가 “시계가 불량하니 회항하라”는 관제탑의 경고를 무시하고 착륙하다 73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빚었다. 불행히도 그 기장은 군출신이었다. 이에 따라 항공업계는 이른바 ‘군인정신’을 주요 위험요 소로 규정하고 군항과 민항을 엄격히 분리하는 추세라고 항공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독일의 루프트한자항공사 등에서는 군출신은 채용하지 않고 있 다.
조종사는 화려한 제복과 많은 경험,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고소득 직종으 로 분명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이렇게 위험투성이다. 모두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씨앗들이기도 하다. 한 조종사는 이렇게 말 했다. “비행과정에서 착각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비행을 하면 할수 록 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6개월에 한번씩 시 뮬레이터를 통한 4시간의 재교육만 있을 뿐이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