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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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질병일 뿐이다. 여러분은 이 명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흔히 질병에서 전인적(全人的)인 모습을 제거하고 질병을 인격적 요소와 분리한 것이 현대의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또 그에 따라 현대의학은 질병은 보되 인간은 보지 못하는 커다란 문제점을 갖게 되었 다는 것이 현대의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현대의학은 질병을 전인적인 조화와 균형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 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파악함으로써 질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하였다. 또한 현대의학은 질병에서 도덕적, 인격적 요소를 배 제하고 질병을 다른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주지하다시피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전근대사회에서는 질병을 전인 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였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에서 음과 양의 조화가 건 강을 담보하며 반대로 그 조화가 깨어지는 것이 병적 상태인 것으로 파악 하였듯이, 서양의 전통의학에서는 네가지 체액의 균형이 곧 건강이며 그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병적인 상태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화와 균형은 다분히 인격적인 요소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 던 것이 대체로 16세기 이래 서유럽에서 꽃피기 시작한 새로운 인체해부 학과 기계론적 생기학에 힘입어 서양의학의 질병관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질병은 보는 사람에 따라 한편으로 냉혹 하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적인 합리성을 갖는다고 여겨지는 과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학의 성과와 위력에 놀라고 대체로 의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현대의학의 그러 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일 터이다.
질병은 단지 과학의 대상일 뿐이며 그 밖에 다른 의미는 없는 것일까? 환 자로서 우리는 대개 질병에서 과학적 대상물 이외에 무언가 인간적이며 도덕적인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예를 들어 감기몸살을 앓는 경우에 우리는 인간존재의 무력함과 한계를 느끼며 또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된다. 이러할 때 감기몸살은 단순히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이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병고(病苦)를 통해 삶의 뜻을 새롭 게 새겨 보기도 하고 역설적이지만 삶에 대한 의지도 키우게 된다. 하찮 은(?) 감기몸살이 아니라 암과 같은 난치병이라면 그러한 의미와 의지는 훨씬 클 것이다. 물론 암과 같은 끔찍한 질병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 앞에 서 맥없이 꺾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학문과 기술로서의 현대의학은 그러 한 의미찾기와 의지세우기에 대해 대체로 무력하다. 사실은 전통의학도 그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병고를 이겨내는 데에(이겨낸다는 것은 의학적인 의미의 ‘치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의학과 의사 이 외에 많은 분야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한 의학과 의사가 질병 과 환자에 대해 더욱 겸손해져야 할 이유도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의사들(또는 정통의학)과 환자들이 각기 생각하는 질병의 의미 사 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점이 있으며, 그러한 차이를 좁히는 것이 현대의학 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방금 언급한 그러한 점은 대체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보다 사회적으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예를 들어 에이즈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 는가? 그것은 단순히 에이즈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성 질환일 뿐인가, 아 니면 인간의 성적 타락에 대한 신의 경고이자 엄중한 처벌인가? 새삼 말 할 나위도 없이 앞의 견해가 현대의학의 관점이고, 뒤의 것이 질병을 도 덕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필자는 누구도 질병에 대한 관 심을 독점하고 또 자신의 견해를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의사들에게나 도덕론자들에게나 마찬가지다. 필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관으로 어떤 질병을 가진 사람을 낙인찍는 일 이다. 가령 에이즈 환자를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대와 중세시대, 아니 얼마전까지 나병 환자에게 채 우던 족쇄를 에이즈 환자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필자의 눈에는 그러한 행 위가 추상적인 종교와 도덕의 명분으로 구체적인 인간들을 인류공동체에 서 배제하는 것으로 비친다.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 질병에 대한 관점은 우리 개 개인과 공동체에 어떠한 구실을 하고 있는가?
황상익/ 서울의대 교수·의학사 및 의료윤리학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