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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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에게는 파니라는 누이가 있었다. 동생 못지 않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닌 파니는 작곡가가 되 고 싶어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누이를 무척 좋아한 멘 델스존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파니가 ‘여자’이기 때문이 었다. “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너에게는 결국 장식 에 불과할 뿐이다. 음악은 너의 존재나 활동의 기반이 될 수도 없고 되어 서도 안 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동생에게 쏟아지는 갈채를 자 기 일처럼 기뻐하는, 정숙하고 얌전한 여성이 돼라고 파니를 타일렀다. 동생 펠릭스가 화려한 명성을 얻으며 작곡발표회를 갖고 연주여행을 다니 는 동안 파니는 아무도 몰래 혼자서 작곡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은 동생 이름으로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파니의 작품은 우아하고 단아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그 탁월함을 입증하는 일화가 있다. 펠릭스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연주했을 때의 일이다. 여왕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하나 골랐다. <이탤리언>이라는 가곡이었다. 바로 파니가 작곡한 것 이었다. 펠릭스는 할 수 없이 여왕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건 제 누 이의 곡입니다.”
1829년, 스물네살이 된 파니는 결혼했다. 상대는 빌헬름 헨젤이란 평범한 남자였다. 결혼을 앞둔 파니의 심경은 퍽 쓸쓸하고 적막했나보다. 친지에 게 보낸 편지가 그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내가 평범한 아내가 되는 것 을 축하해주신 데 감사드리는 일을 잊을 뻔했군요. 오래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예견하고 있었어요. 나의 약혼자는 평범한 남자일 뿐입니다. 남 자들이란 여자들이 창조적인 인생으로 한걸음씩 파고들려 하면 언짢아하 면서 여자로부터 여자다움을 박탈하더군요.”
그러나 파니는 작곡을 포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틈틈이 작품을 쓴 파니는 10년 뒤, 작품집을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펠릭스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펠릭스는 반대했다. 작품집 출판이란 평생을 작곡가로 헌신할 생 각이 있는 사람만이 하는 일인데 파니는 예술가가 되려는 패기도 사명감 도 없다는 거였다. 게다가 너무 여성적이고 주부 일을 다한 뒤에야 비로 소 청중이나 음악에 대해 생각한다는 거였다. 파니가 주부 일을 다한 다 음에 작곡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어디 그의 뜻이었던가.
결국 작품집 출판계획은 무산됐다. 파니는 절망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은 더욱 타올랐다. 그리고 9년 뒤, 파니는 기어코 자신의 작품집을 세상 에 내놓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음악애호가들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용기를 얻은 파니는 새로운 작품에 착수했다. 그러나 너무 늦 었다. 첫 작품집을 출판한 지 3개월 뒤인 1847년 5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파니는 급성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나이 마흔두 살.
오늘날 파니는 작곡가가 아니라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이로만 남아 있다. 아니 멘델스존에게 파니라는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가 대부 분이다. 만일 파니가 아무런 사회적 제약없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더라 면 훌륭한 작곡가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파니의 작품들은 지금 베를린의 멘델스존 작품보관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남아 있다.
파니 외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그 재능이 묻혀버리거나 파괴당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누이 난네를,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 카미유 클로델 등등. 여자가 타고난 재능을 맘껏 발휘하면서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기란 그토록 힘든 것일까.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