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삶

"사이버 미팅으론 만족할 수 없다"

(사진/ 번개모임이 새로운 만남의 수단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컴퓨터통신 번개모임에 참여해 포켓볼을 즐긴다.)

후덥지근한 여름 무더위가 짜증을 부채질하는 지난 8월7일 오후. 서동환( 23)씨는 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꺼리’가 없을까 하고 책상 위의 컴퓨터 를 켠다. 모뎀을 이용 국내통신망에 접속한 뒤 곧바로 대화방에 들어간다 . 대화방 목록에는 그의 눈에 확 띄는 제목이 올라와 있다.

“오늘 신촌서 번개, 포켓볼 치실 분.”

서씨는 곧바로 이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채팅족 4∼5명의 대화가 한참 무르익고 있었다.

“신촌 금강제화 앞에서 5시쯤 어때요.”

“좋아요.

“저도 좋습니다. 근데 어떻게 알아보죠?”

“검은 반바지 차림에 음료수 캔을 들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따 뵐게요. 방장님이 많이많이 모아 오세요.”

오는 12월 군입대를 앞두고 학교를 휴학한 서씨는 오늘도 새로운 친구들 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이날 약속장소에 나온 사람은 서씨를 비롯해 모 두 3명. 나오기로 약속했던 회사원 형님 한명은 무선호출기를 통해 “사 정이 있어서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군복무중 휴가를 나 온 김영수(23)씨도 이미 와 있었다. 동갑내기인 김씨와는 얼마 전 ‘번개 모임’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 두 사람은 대화방에서도 자주 만나는데 실 제로 만나는 것은 오늘로 3번째이다. 그래도 여느 친구 못지 않게 두 사 람은 허물이 없다.

가장 나이가 많은 회사원 홍창우(32)씨는 오늘 처음 번개모임에 나왔다. 홍씨는 “여자분이라도 한명 있었으면 더 좋을 텐데 조금 아쉽군요”라는 농담과 함께 너털웃음을 지으며 동생뻘 되는 이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들 은 곧 인근 당구장으로 가 포켓볼을 친 뒤 근처 카페로 옮겨 시원한 맥주 를 마시며 군대 생활과 직장생활 등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역·연령,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형태

최근 통신인들 사이에는 이같은 번개모임이 새로운 만남의 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다. 번개모임은 이름 그대로 컴퓨터통신 대화방이나 토론방에서 참여자들의 제안과 동의에 따라 갑작스럽게 만나는 자리이다. ‘방장’이 라고 불리는 제안자가 번개모임을 제안하면 관심있는 통신인들이 해당 대 화방으로 들어가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 채팅이 통신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문자를 매개로 한 만남이라면, 번개모임은 이런 만남을 현실공 간으로 확대한 것이다. 컴퓨터통신을 통한 실제 만남은 통신인들의 동호 회 등을 중심으로 이미 활발히 벌어지고 있지만, 번개모임은 누구든지 개 인적으로 대화방을 개설해 즉각적인 모임 제의가 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천리안이나 하이텔, 나우누리 등 국내 컴퓨터통신의 대화방이나 게시판에 들어가면 번개모임을 제안하는 방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금요일 오후 나 주말에는 “강남역 번개 20대 중·후반” “오늘 신촌서 번개, 포켓볼 치실 분, 여성분 환영” “비도 오는데 무교동 근처 직장인들끼리 맥주나 한잔 합시다” 등의 제목으로 올린 번개모임 제안이 많이 뜬다.

번개모임은 연령이나 지역별로 이뤄지기도 하고,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 기도 한다. 모임의 목적도 참여자들의 나이나 관심분야에 따라 포켓볼이 나 볼링을 치거나, 영화 보기, 맥주 마시기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이 렇게 목적을 정하지 않고 만난 뒤 참여한 사람들끼리 그날의 계획을 짜기 도 한다. 회비는 주로 1만원 정도가 대부분이나 경우에 따라 2만∼3만원 이 되기도 한다.

번개모임이 대부분 일회성으로 끝나지만 서씨와 김씨처럼 서로 의기투합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날 경우 계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 지난해 부터 번개모임에 참가해온 서씨는 많으면 일주일에 4∼5번씩이나 번개모 임에 나가기도 했다.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도 이런 번개모임을 통해 만났다. 그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지만 대화방에서 충분히 대화를 하고 만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면서 “내성적인 사람도 이런 만남을 통해 대인관계의 폭을 좀더 넓힐 수 있다”고 말했다 . 실제로 통신에는 이처럼 번개를 통해 만난 커플이 결혼했다는 소식도 가끔 올라온다.

김영수씨는 “포켓볼 짝이 안 맞을 때 컴퓨터통신에 번개를 쳐 함께 칠 사람을 모집하면 적어도 1∼2명 이상 모인다”며 “서로 마음이 맞을 경 우 2차, 3차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여성 참석자가 없어 썰렁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남자보다 더 많이 나올 때도 있다. 얼마 전 영화보기 모임에 참석한 김정희(21·대학생)씨는 “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라 처음에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막상 만 나 보니 모두 좋은 사람들이어서 영화를 보고 난 뒤 함께 커피를 마시면 서 영화에 대한 토론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즉흥적인 모임에다 서로가 모르는 사이이다 보니 예상보 다 참석자가 적어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경우도 있다.


정보 교환에 삶의 활력소도 얻는다

지난 8일 오후 5시 종로에서 만나기로 한 번개모임의 경우 최소한 5명 정 도가 나오기로 했는데 막상 2명밖에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아 제안자를 머 쓱하게 하기도 했다.

방장인 김아무개(28·회사원)씨는 “나올 사람들은 서로 무선호출번호를 남겨 약속장소에서 엇갈리지 않도록 연락한다. 그런데 약속해 놓고 나오 지 않은 사람도 있어 참석자가 얼마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말했다.

번개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컴퓨터 세대인 대학생 등 신세대들이 많다. 그러나 컴퓨터통신이 보편화되면서 30대 회사원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일과가 끝난 뒤 맥주 한잔을 나누며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정보 도 교환하는 새로운 만남의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회사원 김영철(34)씨는 “번개모임에 가끔 드라이브 상대자나 폰팅 파트 너를 구한다는 짓궂은 제안도 있지만 대부분 취미를 함께 즐기거나 그날 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모임들”이라면서 “업무와 관련없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적은 회사원들에게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부담없는 만남이 신 선한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창은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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