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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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일합병 이후 비밀결사인 대동단의 총재로. 3·1운동이 좌절된 이후엔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고문과 김좌진이 이끌던 군정서 고문으로 일했던 동농 김가진.)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한 원한을 품고 만리타향의 망명생활 중에 세상을 떠났다. … 독립운동의 수령으로는 가장 연로한 사람으로, 상하이에 건너 간 이후로 고령은 거의 극도에 이르러, 팔십의 나이인데도 하루 한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다… 이 세상을 마치었어라!” 1922년 7월7일자 <동아일 보>는 한 독립운동가의 쓸쓸한 죽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동농(東農) 김가진. 1846년 안동부사 김응균의 서자로 태어나 문과에 급 제한 뒤 공조판서와 충청도관찰사,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한 구한말의 개화파 관료. 일제의 조선 강점 음모가 본격화되자 독립협회 위원과 대한 협회 회장을 맡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한일합병 이후 비밀결사인 대동단의 총재로, 3·1운동이 좌절된 이후에는 일흔네살의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고문으로, 그리고 김좌진이 이끌 던 군정서 고문으로 일하다 극도의 궁핍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군사정권 땐 서훈 신청도 안 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만은 사회장으로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당시 신문은 쓰고 있다. 임시정부가 최고의 예우를 갖춘 때문이다. 난징의 금 릉대학 등 중국 각지 30여개 학교에서 조문단을 보내왔고, 임시정부의 홍 진 주석이 식사를, 조완구가 약력을, 이발과 안창호가 추도사를 했다.
그 동농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75년이 된다. 그러나 동농의 유해는 아 직도 그가 살아 생전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상 하이의 ‘서가희 만국공묘’에 묻힌 그의 유해는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 위병들에 의해 비석조차 부서져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잡풀 무성한 묘지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묻힌 채 아무도 돌보지 않는 것이다.
손자 김자동(69·서울 양천구 신정동)씨는 지난 94년 국가보훈처에 동농 의 서훈 신청서를 처음으로 냈다. “박정희 정권이 5·16쿠데타에 이어 독립유공자 서훈사업을 시작했지만, 정통성 없는 정권에 독립유공자 심사 를 맡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동안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민정부 들어서야 ‘내가 죽기 전에 유골이라도 모셔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서훈 을 신청했지요.” 신규식 선생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서 불과 10여m 지점, ‘6119-B’라고 적힌 묘지의 자리번호표만은 아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 어서 묘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만국공묘가 중국 정부에 의해 ‘ 송경령 능원’으로 조성돼버려 정부가 나서서 중국과 교섭을 벌이지 않고 는 유해를 모셔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독립유공 자 서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보훈처의 통보는 “서훈 대상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임정고문 ’을 지낸 애국지사로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김씨로서는 뜻밖이었다. 김씨 는 95년 3월 자료를 보충해 다시 신청서를 냈다. 이번에는 “심사결과 2 등급에 해당하는 대통령장을 받을 것 같다”는 통보를 김승곤 당시 광복 회장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달 뒤 “2차 심사결과 서훈이 보 류됐으니 그리 알라”는 통보가 다시 왔다. 김씨는 아직도 그 이유를 정 확히 알지 못한다.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큰아들·며느리도 국민장 받았는데…
동농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을 벌인 큰아들 의한(납북), <녹두꽃 >이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며느리 정정화(91년 작고), 광복군으로 활동한 손자 석동씨(자동씨 사촌) 등은 국민장 또는 애족장을 이미 받았다. 그런데도 이들을 독립운동의 길로 이끈 동농만은 서훈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가 무엇일까?
국가보훈처 현동중 자료관리과장은 “동농이 훗날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 지만, 일본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 했다. 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친일의 정도가 큰 것으로 결국 죄가 공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동농이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일제는 종3품 이상 고관 72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일본은 이를 “조선말 귀족들은 한일합병에 찬성했다”고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기록은 “동농이 작위를 받은 것과 그의 친일행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 국사대사전(백만사)의 김가진 항목에는 “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고 쓰고 있다.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 신문화연구원)은 “그뒤 반납했다”, 한국독립사(김승학)는 “받지 않았 다”고 썼다. 일제 또는 친일한국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조선독립소유사 론>도 “일한합병 당시 대한협회 고문으로 합병에 반대의 태도를 취하더 니, 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 기뻐하지 않았다)하였다”고 쓰 고 있다.
(사진/1922년 7월 동농의 장례식 장면. 그의 장례식은 망명정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 )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도 “동농은 1894년 갑오경장까지는 진보적·친일적 경향을 띤 개화세력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자료들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되고 그 임원으로 선정된 뒤로는 독립과 근대 화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한다.
물론 동농에 대한 평가가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도 한때 엇갈렸던 것 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동농이 망명할 때부터 숨질 때까지 줄곧 곁에서 지켜본 독립운동가 나절로 우승규 선생은 그의 저서 <나절로 만필> ‘동 농옹의 구국원정’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김옹(동농)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나 한인사회에서는 환영이 대 단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색안경을 쓰고 봤다. 혹시 이강씨를 받들어 소 위 복벽운동을 하자는 게 아니냐고 이론이 엇갈렸다. 그랬지만 오해는 곧 풀려 동농은 임정의 최고고문으로 추대되고, 본격적인 항일구국운동의 전 열에 참여했다.”
나절로는 선생의 망명은 “대외적인 선전효과도 여간 아니었다”고 증언 한다. “동농의 망명사실은 상하이의 영자지 <차이나 프레스>를 비롯해 < 신문보> <신보> <시보>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또한 탕샤오이(당소의 ) 같은 중국의 노정치가도 경의를 표하러 예방한 것을 봤다.” 그는 누군 가가 동농을 친일부역자로 깎아내리는 데 대해 화를 내며 “설사 그같은 (친일)혐의가 있다고 하자. 그러기에 이공속죄(以功贖罪)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밉보인 후손에 대한 졸렬한 보복?
당시 <동아일보>는 동농에 대한 해설기사에서 그를 “한일합병 당시 귀족 의 작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김윤식 이용 직 등 2명이 있었지만, 해외에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벌인 이 는 오직 동농 한 사람뿐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면 동농은 왜 버림받고 있는 것일까? 독립운동을 하다 친일로 돌아 선 인물들조차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너도나도 받은 마당에 동농만은 안 된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김자동씨는 “서훈을 내리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동안 후손들이 복지부 서훈심사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으며, 또 반정부적인 활동을 한 전력이 있다는 게 진짜 이유일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한다. 실제로 김씨는 4·19혁명 이후 반정부적인 신문인 <민족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그뒤로도 민간통일운동에 줄곧 참여해 정부쪽과 거북한 관계였다. 또 광 복군 출신인 김씨의 사촌형 석동씨도 80년대 광복회에서 줄곧 친일파에게 서훈이 주어진 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훈처와 끊임없이 충돌했 다.
김씨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에서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동 농을 친일부역자로 모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농에 대한 평 가는 그때 끝난 것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김영삼 정부는 정권출범 뒤 지난 시절 잘못된 독립유공자 서훈심사를 바 로잡겠다고 몇차례 공언해왔다.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도 한때 추진했 다. 그러나 친일파가 애국자를 심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 우승규 선생이 내뱉던 한탄은 아직도 들려온다. “사이비한 애국자 들도 내로라 하는 세상. 더구나 이제는 친일이고 반일이고 모두 뒤죽박죽 이 돼버렸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