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초점

“대표 시켜달란 말이야!” 이회창-허주 줄다리기

(사진/사무총장을 민주계가 맡은 만큼 대표는 민정계가 맡아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게 허주 진영의 논리다. 8월8일 신한국당 당직자 이취임식 모습.)

신한국당 당직 개편 하루 뒤인 지난 8월8일 저녁 시내 한 음식점. 이회창 대표의 측근인 ㄱ 의원과 허주(김윤환 고문의 아호)의 핵심 측근인 ㄴ 의 원이 마주앉아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회창 대표를 여당 대통령 후 보로 만든 ‘동지’인 두 사람의 회동 분위기는 그러나 화기롭지만은 않 았다. 오히려 때때로 언성이 높아지고 얼굴을 붉히는 등 긴장감마저 감돌 았다.


허주 측근들, 허주에게도 압박

약 2시간에 걸친 두 사람의 회동 주제는 ‘당 대표’문제였다. 이회창 대 표가 당 총재직을 언제 이양받을 것이냐는 시기 문제와 후임 대표를 누구 로 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물론 이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이 허심탄회한 토 론을 벌였다기보다는 ㄴ 의원이 ‘차기 대표는 허주가 맡아야한다’는 허 주쪽 입장을 이 대표쪽에 거의 일방적으로 전달했다.

허주쪽의 논리는 연말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주류가 분명하게 형성돼야 하며, 당을 주류가 맡아 안정되게 후보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류의 대표자는 일등공신인 허주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번 선거에서 승 부처가 될 대구 경북의 표를 얻기 위해서도 허주를 전면에 내세워야 유리 하다는 것이다. 또 사무총장을 민주계가 맡은 만큼 대표는 민정계가 맡아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도 허주 대표론의 근거로 제시됐다. ㄴ 의원은 ㄱ 의원에게 “비주류 중진들이 반발해 튀는 것은 겁나고, 허주가 튀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냐”며 “만일 허주를 제치고 다른 사람을 당 대표로 지명한다면 허주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이 대표를 따르지 않을 것 ”이라고 ‘통보’했다.

이회창 후보 선출의 일등공신인 허주쪽 입장을 잘 보여준 일화다. 허주쪽 은 이번에 대표직을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지난 92년 대선 때 김영삼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등공 신이었면서도 초반기에 김 대통령의 ‘요청’과 주변의 눈총 때문에 뒤로 물러났다가 5년 내내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했던 경험에 비춰 이번에는 초 반부터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번에도 화합과 결속이라는 이유 때문에 2선에 물러나 있게 되면 이회창 후보 주변에 새로운 중심세 력이 생겨나고, 그러면 자연히 이들의 견제를 받아 정치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허주의 핵심 측근들은 이처럼 이 대표쪽을 향해 정치적 압력과 회유 작업 을 펴는 한편 장본인인 허주에게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사람좋은’ 허 주가 “다음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잠깐 물러나 있어 달라”는 이 대표의 간곡한 요청에 무너지지 않도록 허주의 전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김태호 의원 등 허주계 중진의원들은 이와 관련해 최근 “ 이번에 대표직을 따내지 못하고 어물어물 양보하면 당신을 더이상 따르지 않겠다”며 허주에게 협박성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윤환 고문 본인도 이에 대해 “허주가 그렇게 물렁물렁한 사람이 아니다”며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김 고문은 조만간 이회창 대표를 만나 직접 담판을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창 “천천히 합시다”

그러나 이 대표쪽에서는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정치적 일 정을 느긋하게 잡아두고 있다. 총재직을 빨리 이양받지 않는다는 방침도 그런 맥락이다. 새 대표를 둘러싼 논란은 총재직 이양 이후로 미뤄질 수 밖에 없다는 고려가 깔려있어 보인다. 당초 이 대표는 정기국회 전인 8월 말이나 9월 초 당 총재직을 이양받으면서 새 대표를 지명하고 곧바로 당 직개편을 단행하는 정치일정을 구상했다. 그래서 지난달 말 박관용 사무 총장 등 당직자들이 낸 사표를 반려했다. 그러나 아들 병역문제 등으로 당직자들의 사표를 반려한 지 불과 열흘 남짓 만에 당 3역을 전면 교체하 는 대대적 당직개편을 단행했다. 일단 당체제는 정비됐기 때문에 당 총재 직 이양문제 등 지도체제에 화급히 손 대야 할 이유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총재직 이양문제는 이제 여유가 생긴 것 아니냐” 며 “굳이 빨리 총재직을 넘겨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부총재제 도입 등 이 대표가 당 경선 때 내세운 공약도 뒤로 미룰 수 있게 됐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부총재제는 계보정치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당에서는 득보다 실이 크다”며 “최소한 연말 대선 전 에는 지도체제 개편문제는 손대지 않는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 주변에서는 이에 따라 당 총재직을 김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오 래 남겨두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당 총재직을 김 대통령이 가지고 있 어야 경선 후유증 극복 등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다. 이 대표 자신도 “총재직을 빨리 넘겨받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해 총재직 이양을 늦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대표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총재직 이양문제는 현재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정기 국회 때까지는 현재대로 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9월 말이나 10월 초 대선대책위원회를 구성할 때 총재직을 이양받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것 이다. 8월 말이나 9월 초 총재직 이양에 이은 새 대표 임명을 희망하는 허주쪽의 견해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는 일단 이 대표쪽에서 ‘허주 대표 론’을 배척하고 있거나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달가워하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대표의 측근들 중에서 허주 대표론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역 의원들은 주로 허주 대표체제로 주류의 안정성을 공고히 하자는 의견이다.

그러나 개혁적인 초선 의원들의 모임인 ‘바른정치모임’이 얼마 전 “개 혁과 보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허주에 대한 견제를 하 고 나온 데서 알 수 있듯 소장파들 사이에선 반대론이 우세하다. 일부 인 사들은 아예 “허주는 이미 우리편이 된 만큼 당분간 뒤로 빼놔도 괜찮다 ”며 “우선은 결속을 위해 이한동 의원이나 이수성 고문 등 반대파들을 껴안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자민련과의 연대 설이 나오는 이한동 의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의원을 대표에 지명하고, 선대위의장에는 TK(대구 경북)표를 감안해 이수성 고문을 추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한동 고문의 경우 지난 3월 당 대표직에 거의 다가갔다 가 이회창 대표에게 밀린 경험이 있는 만큼 이번에는 그에게 양보할 필요 가 있다는 견해도 대두되고 있다. 허주쪽에서 “이 대표쪽에게 다른 중진 의원을 대표로 기용하면 허주가 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은 사실 ‘이한동 대표론’을 겨냥한 측면이 강하다.


여권 판도 가늠할 최대 관심사

이에 일부에서는 야권의 양 김씨를 겨냥해 차라리 김덕룡 의원을 내세워 정치권 세대교체를 강조하자는 견해도 대두되고 있다. 젊고 개혁적인 김 덕룡 의원을 당 대표에 지명해 야권과의 차별성을 두드러지게 하자는 것 이다. 이 경우 김윤환 이한동 이수성 고문 등 노장층을 공동선대위원장으 로 추대함으로써 중진간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김 덕룡 의원쪽도 당 대표직을 희망하고 있으며, 경선 직후 일찍부터 이 대 표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나선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김덕룡 대표론에 대해서는 회의론도 만만찮다. 중진들의 소외감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뿐 아니라 강삼재 사무총장의 등장으로 강 사무총 장과 경쟁관계인 김덕룡 대표 카드를 꺼내들기가 쉽지 않게 됐다는 것이 다.

이에 따라 김명윤 이만섭 의원이나 이홍구 전 대표 등 원로들을 대표에 앉히는 ‘관리형 대표론’도 제기되고 있다. 자기 세력이 있는 당내 중진 들보다는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지 않은 원로 중진들을 대표로 내세움으 로써 이회창 대표의 리더십을 세우는 한편, 당내 중진들간의 갈등이나 알 력도 피하자는 계산인 것이다. 선대위원장은 새 대표가 누가 되느냐에 따 라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차기 대표 문제는 대통령 후보이자 차기 여당 총재로서 정치적 위 상과 세력을 확실히 굳히고자 하는 이회창 대표와 일등공신으로서 당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려는 허주간의 줄다리기 성격이 강하다. 이 싸움에 서 김 대통령의 분신 강삼재 의원이 대선을 지휘할 사무총장으로 이회창 대표를 뒷받침할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것은 허주에게는 별로 반가운 신호가 아니다. 김 대통령이 이 대표를 감싸고 도는 것 자체가 허주의 역 할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 대표 문제는 김 대통령과 이회창 대표, 김윤환 고문 3자간의 역관계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여권의 세력재편과 관련해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