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진단

한-일관계 ‘최악의 세월’

(사진/하시모토 총리와 악수하는 김영삼 대통령. 현 정부 들어 일본관리들은 과거 노태우 정권 때보다 2배 이상 많은 `망언시리즈'를 연발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 일본과의 관계는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했다. 양국간 현안도 해결되기는커녕 뒤틀리기만 했다”

한 전직 외교고위관리는 김영삼 정부의 대일외교 5년에 대해 이렇게 매몰 찬 평가를 내렸다. 일본과의 관계가 과거정권보다 훨씬 후퇴했다는 것이 다.


진전한 분야 전무… 국민감정만 나빠져

실제로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한-일 사이에 놓여 있는 현안 가운데 제대 로 해결된 사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95년 한-일수교 30주년을 맞 아 두 나라가 추진키로 했던 공동사업이 완전 백지화된 것은 김영삼 정부 의 대일 외교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애초 두 나라는 95년 초 공동경축행사 및 공동학술회의 개최 등 ‘한-일수교 30주년 공동사업 ’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으나 관계 악화로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두 나라의 현안들은 현정부 들어선 이후 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보다는 갈수록 꼬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사 문제뿐 아니라 종군위안부, 독도, 어업협정, 무역적자 등 어디를 둘러봐도 진전 된 분야가 거의 없다. 여기다 국민감정마저 나빠져 ‘새로운 한-일관계’ 는 유명무실해졌다.

물론 한-일관계가 진전되지 못하고 퇴조한 데는 일차적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과거사에 대해 철저 하게 무성의로 일관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성실한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런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 그 리고 오히려 현 정부 들어 일본과의 관계가 후퇴했다는 사실은 김영삼 정 부의 대일외교에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한다. 특히 김 대 통령의 ‘비외교적 발언’들은 두 나라 사이에 쓸데없는 감정적 대립만 불러왔다는 것이 외교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현 정부는 출범 초 대일 관계를 ‘미래지향적 관계로 승화시키겠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놨다. 그러나 이때부터 과거사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망언은 끊이지 않았다. 과거 노태우 정부 때보다 2배 이상 일본관리들의 ‘망언시리즈’가 잇따랐다. 한-일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이라 할 과거사문 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4년 5월 “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이 라고 하는 정의는 잘못된 것”이라는 나가노 일본 당시 법무장관의 망언 을 시작으로 94년 8월에는 사쿠라이 당시 환경청 장관의 ‘태평양전쟁 미 화’, 94년 10월 하시모토 통산장관의 ‘침략전쟁 부인', 95년 6월 와타 나베 전 부총리 겸 외무장관의 ‘한-일 합방조약 합법체결’, 95년 8월 시마무라 문부장관의 ‘침략전쟁 부인’, 95년 10월 무라야마 당시 일본 총리의 ‘합방조약 법적 유효’ 망언 등이 잇따랐다.


‘버르장머리…’발언 파문

(사진/직선기선문제에서도 우리 정부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었다. 탑골공원에서 열린 시민단체들의 어선 납치 규탄대회. )

종군위안부 문제도 진전된 것이 거의 없다. 우리 정부는 김영삼 정부 초 기 위안부 해결 3대원칙으로 △연행의 강제성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위 안부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며 △위안부 문제를 교훈으로 삼겠다는 의 지표명을 할 것 등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어느 것 하 나 실현된 것이 없다. 일본은 국가차원의 보상을 외면한 채 ‘여성을 위 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란 민간단체를 만들어 종군위안부들에게 민 간기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94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이 위안부 동원이 국 제법을 위반했으며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배상을 실시하도록 촉구하는 내 용의 보고서를 발표했으나 아직까지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국가차 원의 책임 시인이나 배상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독도 문제나 직선기선 문제에서도 우리 정부는 일관된 자세를 보이지 못 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 정부는 애초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EEZ)와 어업협정개정 문제를 동시에 협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최근 경제수역문제와 어업협정을 분리해 해결하기로 하는 등 대일 강경자 세에서 한발 물러났다. 한-일간 무역수지 역시 대일무역적자가 94년 1백1 8억달러와 95년 1백55억달러, 96년 1백51억달러 등으로 줄어들 기미가 보 이지 않는다.

외교 전문가들은 대일 외교가 진전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현정부 의 외교철학 부재를 꼽기도 한다. 한 외교전문가는 “한-일간의 외교는 특히 장기적인 시각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그러나 현정부 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즉흥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감정만 상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그동안 일본과 의 관계에서 국가원수답지 않게 거친 용어를 사용하거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사안에까지 ‘개입’함으로써 두 나라 외교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일이 몇차례 있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는 김 대통령의 발언이나 독도문제로 한-일간에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 는 시점에 대통령이 직접 독도 경비대장과 전화통화를 가진 것 등이 이런 사례에 꼽힌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노사카 관방장관은 당시 김 대통령의 ‘버르장머리’발언과 관련해 “대통령으로서 좀더 절도있게 발언해 주기 바란다. 국가원수로서 사용할 용어는 아니라고 본다”고 불쾌감을 나타내 기도 했다.


외교는 외교적으로 접근해야

다른 외교전문가는 “두 나라간에 첨예한 대립이 있더라도 대통령은 최후 에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이라며 “한-일간에 외교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데도 일이 꼬인 데는 김 대통령의 성급한 자세도 한몫했다”고 말했다. 외무장관을 역임한 국민회의 이동원 의원(전국구)도 “한-일 두 나라 관계는 옛 감정만 갖고 접근하면 안 되는데 김 대통령은 국내정치를 의식해 극단적으로 접근하는 잘못된 자세를 보였다”며 “김 대통령이 국 내에서 뻐기는 것은 봐줄 수 있으나 국제무대에서도 그러니 일본과 미국 등 전통적 우방국과의 관계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혹평했다.

지난 5년간 한-일관계의 악화는 두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감 정적 접근에서 벗어나 ‘외교는 외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교훈을 안겨줬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21일 제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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