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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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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아니 베르사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름이나 알게 된 것도 그가 비명횡사하고 6일이 지나서였다. 그것도 세계적인 모델 나오미 킴벨이 그 의 죽음 앞에서 터뜨린 울음이 실린 해외토픽란에서야 알았으니 꽤나 속 되다.
패션디자인의 황제 베르사체. 이브 생 로랑,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그의 앞세대 디자이너들이 고급 맞춤복에 전념할 때 그는 패션을 디자인 산업 으로 확산시켰다. 상류사회 전유물인 패션을 대중화시킨 주역이었던 것이 다. 동시에 제품의 품격을 끝끝내 고집, 그의 상표는 소비자들에게 고급 품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했다. 대중성과 함께 최고급 품격은 할리우드 배 우와 슈퍼모델들을 베르사체 신도로 사로잡게 했다.
죽은 지 7일째인 지난 7월22일 열린 그의 추모미사는 생전에 그리고 사후 에까지 그가 누린 권위와 존엄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전세계에서 2천여명 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이 몰렸고 그 중에는 다이애나 전 영국황세자비, 팝스타 엘튼 존, 스팅, 패션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발렌티노 등이 포함돼 있었다. 엘튼 존은 스팅과 추모곡을 부른 뒤 15분간 침묵한 채 서 있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베르사체는 퇴장하는 순간까지 패션디자인 의 황제로 그 기품과 위엄이 빛났다.
24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한 법조인의 죽음에 부쳐 "인권신장을 위한 그 의 헌신은 수많은 미국인들, 특히 나 자신을 포함한 젊은 법학도들을 감 동시켰다"고 극진한 애도를 표시했다. 미국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법조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윌리엄 브레넌, 오늘날 미국의 인권을 지켜냈다 는 그는 이날 별이 되어 모든 미국인의 가슴에 잔잔한 빛을 남긴 채 세상 을 떠난 것이었다.
베르사체의 추모미사 하루 전인 21일 한국에선 `문민황제'의 퇴장을 알리 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의 해가 기울면 내일의 해를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그날 세상 인심은 몹시도 야박했다. 아직 완전히 퇴장 하려면 7개월이나 남았는데도 문민황제는 이날 새로이 떠오른 권력 중심 의 소품이었다. 특히 이회창 후보당선 축하연설에서의 다짐은 그의 소품 구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불끈 그러진 주먹, 단문으로 이어지는 단호한 어투, 단락 단락마다 박수를 기다리며 청중석에 던지는 눈초리의 매서움, 그것은 10년전 군정종식을 외치고, 5년 전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특혜의혹을 제기할 때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내용은 "정권재창출(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의 다짐 일색이었다. 당 총재로서 의레적인 다짐이 아니 었다. 지난 5월 `중대결심'이라는 엄포까지 동원하며 추진을 독려했던 정 치개혁법안의 뼈대들은 여당 후보의 프리미엄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빼버 렸다. 7월24일엔 부정한 돈의 정치권 유입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여겨졌던 돈세탁방지법안마저 무기한 표류시켰다.
그의 정권재창출 노력이란 결국 떠오르는 태양에 대한 견마지로의 다짐일 뿐이었다. 퇴장 이후의 안전을 위한 것일까. 시작할 때는 끝을 생각하고 끝날 때 이름 석자만을 걱정하라 하지 않았던가. 누울자리를 위해 그렇게 무 진 애를 썼던 두 전직 대통령이 지금 얻은 것은 단 3평짜리 감방이다. 떠남이 아름다웠던 베르사체, 브레넌, 그러나 우리의 문민황제는 빛나는 그 모 든 위엄과 가치를 포기한 채 견마잡이가 되어 퇴장을 미루려 한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