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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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8월07일 제 1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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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우리 민족의 창세신화를 총1백권 분량에 담아 영화화할 예정이였던 <천국의 신화>. 작가 이현세씨에 대한 검찰의 소환 조사로 완간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7월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입불가 판정, 7월22일 <나쁜 영화& gt 등급부여 보류 판정. 7월23일 서울지검 <천국의 신화>를 그린 만 화가 이현세(43)씨 음란문서 제조 등의 혐의로 소환.
최근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들 영화, 만화가 당국의 몽 둥이 찜질을 받는 이유는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국민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주요 논지다.
체면 내세운 검찰의 횡설수설
이중 특히 이현세씨의 검찰소환은 정말 ‘검찰의 신화’를 남기기에 충분 했다. <빨간 마후라>로 잔뜩 의욕에 불탄 검찰, 그중에서도 교육·청 소년 문제를 담당하는 서울지검 형사1부의 한 초임검사는 발간된 지 이미 7개월이나 지난 <천국의 신화>를 뒤늦게 발견, ‘성인용이지만 청소 년들에게 유해’, ‘하드코어 포르노’ 등으로 간주해 부장검사의 결재를 맡아 이씨를 소환 조사했다. 당시 이씨는 만화수출을 위해 인도네시아에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지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검찰은 의외의 반응이 나오자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래서인지 이씨가 검찰에 출두하기 전인 7월21일 문제장면만을 따로 복사 해 출입기자들에게 나눠줬고 옆에 친절히 검찰 각주를 붙여놓았다. “커 다란 얼룩무늬의 구렁이와 여자가 교미하여 구렁이가 벗은 여자의 몸을 휘감고, 여자도 두 다리로 구렁이의 목을 꼬아감고 절정에 이르러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 음부를 구렁이에 맡기고 몸을 뒤틀며 신음하는 여자의 그림, 구렁이가 여자의 몸 위에 올라가 움직이고 여자는 흥분에 몸을 젖히며 신음하는 그림”(3권 1백50∼1백61쪽). 느끼는 게 많기도 하 다.
이씨 소환 전에 여론은 이미 검찰편이 아니었고, 더구나 검찰 출두시 이 씨의 당당한 입장표명은 검찰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씨를 귀가조 치한 뒤 검찰의 일성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사법처리 방침”이 었다. 창작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반성’이 어떤 의미인가? ‘반성’ 이 중요한 건지, ‘검찰의 위신’이 중요했는지. 검찰은 그뒤에도 횡설수 설했는데 7월25일 오전엔 “9월 말까지 계속 수사예정, 자문도 구하고 외 국사례도 검토하겠다”고 했다가, 오후엔 다시 “8월 초까지 마무리짓겠 다”고 했다. 이번 조사를 담당한 검찰의 결재라인 중 담당검사 외에 이 현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검사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 대다수는, 최소한 40대 미만이면 90% 이상이 이현세가 누구인지 알고 있 다. 검찰이 체면치레를 위해 더이상의 무리수를 두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이현세를 아는 사람 모두의 바람이다.
신문사 기자로 처음 들어오면 대개 6개월간의 혹독한 수습기자 생활을 거 치게 된다. 수습기간중 경찰서에서 하루 4시간씩밖에 못자면서 사건현장 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쉴새없이 선배(1진)기자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수 습기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자질구레한 사건을 엄청 중요한 것으로 착각 하거나, 남들이 이미 다 아는 것을 자신이 제일 먼저 발견한 양 입에 거 품을 물기도 하고, 반대로 중요한 사안을 그냥 흘려버리기도 한다. 그래 서 수습기자의 게거품을 액면 그대로 믿는 곰바우는 기자 사회에선 없다. 그런데 검찰사회는 조금 다른가 보다.
영화의 기본도 없는 공륜의 잣대
시대착오는 검찰뿐 아니다. 지난해 “사전심의가 사실상의 검열로 위헌” 이라는 헌법재판소 판결에도 불구하고 형식만 조금 바꿔 여전히 실질적인 사전검열을 행하고 있는 공연윤리위원회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l t나쁜 영화>에 대해 각각 ‘수입불가’와 ‘등급외 판정’ 결정을 내렸 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처음 ‘영화 수입심의’ 위원들 사이에 3:3으 로 입장이 맞섰다. 그러자 김상식 공륜 위원장이 직권으로 불가에 표를 던져 불가로 결정났고, 재심위원회에선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로 불가(不可 )로 최종결정됐다. 그런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재심이 열렸던 지난 7월11일, 18명의 윤리위원 중 10명 정도가 참석한 그날. 영화를 다 본 한 위원이 공륜 관계자에게 물었다. “왕가위 감독이 이 영화로 칸영화제 감 독상을 받았다는데 맞냐?”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으로 상 받은 건 아닙니다.”
그날 참석한 한 위원이 전해준 말이다. 왕가위 감독이 지난 5월18일 <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영화에 조금 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안다. 그 위원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수입불가 판정을 내리고 며칠이 지난 그때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 다. 공륜 영화부 김규식 과장은 “그날 참석하진 않았지만 그럴 리는 없 다”고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왕가위 감독의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칸에선 <해피 투게더>로 발표됐고 중국에선 <춘광사 설>로 개봉됐으니까.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은 문체부에서 3년 임기로 위 촉하고 그 위원들은 외국영화와 국내영화 모두에 대한 관람 결정권을 갖 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인 셈인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관련해 심의위원들은 하나같이 “남자들이 함 께 생활한다는 것이 역겹더라.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유재 천 영화수입심의 위원장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영화 자체의 미 학적 수준으로는 잘 만든 영화다. 하지만 공륜이 미학적 완성도에 의해 수입가부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영화를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
<나쁜 영화>는 오럴섹스, 윤간 등이 문제가 돼 사실상의 ‘등급외 판 정’을 받았다. 공륜에서 수정, 삭제를 지적한 사항은 크게 여섯 장면. 단란주점에서의 변태적 행위, 비디오방과 상가 화장실에서의 오럴섹스, 윤간, 청소년 선도위원회에서의 구타, 윤간 뒤 구타로 기절하는 장면 등. 장선우 감독은 이런 지적에 대해 “작품을 잘못 보고 있다. 마지막 윤간 장면은 나쁜 아이들의 파국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이며 선도위에서의 구 타나 상가 화장실에서의 오럴섹스는 어른들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장면인 데 삭제하라는 건 이 영화를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라며 “출연 한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이렇게 추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 서”라고 말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나쁜 영화>나 모두 성년자 관람불가인 셈이다. 오직 성인(聖人)들인 윤리위원들만 봐도 괜찮은 영화. 3류 인생 들을 그린 영화 <넘버.3<가 8월2일 개봉된다. 최근의 사태를 보면 ‘ 세계일류’를 부르짖는 우리 사회가 거꾸로 ‘넘버.3’가 돼가는 느낌이 다. ‘넘버.3들’ 때문에.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0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