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정부가 기아를 서서히 죽인다?

(사진/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한국 유일의 선진국형 기업인 기아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드높아지고 있다. 7월26일 용산가족공원에서 열린 `기아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 발대식'.)

요즘 기아사태 해법을 둘러싼 공방에서 강경식 부총리가 보여주는 행동은 그의 별명인 ‘强硬式’(강경식)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케한다. 그는 7월2 5일 신한국당과의 당정회의에서 “기아사태는 경영의 문제이며 개별기업 의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 15 일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지정된 뒤 고수해 온 ‘정부개입 불가- 민간자율 처리’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는 28일 기아 관련 금융기관 장 모임을 주재했지만 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여론의 따가 운 질책을 의식한 ‘제스처’에 불과했을 뿐이다. 기아 임직원들의 자구 노력은 물론 시민단체들이 ‘기아 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을 결성하는 등 기아 살리기 운동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정치권까지 정부의 적 극 대처를 요구하고 나선 마당에 계속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 별도 대책없이 금융기관에만 맡겨

강 부총리는 당정회의에서 “정부로서는 기아그룹의 3자인수는 생각지 않 고 있다”는 말도 했다. 정부가 개입을 꺼리고 있는 이면에는 결국 기아 를 삼성에 인수시키려는 시나리오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삼성그룹에 대한 승용차사업 진출 허용이 정치 적 이해에 따라 이루어진 김영삼 정부의 최대 실책 중 하나로 꼽히고 있 지만 정작 강 부총리는 삼성차의 부산 신호공장추진위원장을 맡은 ‘전력 ’이 있다. 일부에서는 국내 자동차산업이 구조조정의 도마 위에 올라 있 는데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강 부총리가 기아사태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는 ‘직격탄’까지 퍼붓고 있다.

직접 개입을 꺼리는 정부의 입장에 수긍할 만한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실기업 정리가 종래의 정부주도에서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민 간자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따 라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수단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기 아계열사의 부채를 채권은행의 출자로 전환해 주거나 지난 80년대 초 미 정부가 크라이슬러사에 대해 해준 것처럼 정부가 기아에 대해 지급보증을 해주는 방안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재경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직접 지원과 개입이 있으려면 먼저 확고한 명 분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면서 “외부차입에 의존한 무리한 기업확장으 로 부실을 초래한 기아에는 명분이 약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아에 지원을 해주면 이미 부도가 난 기업은 물론 앞으로 부도가 나거나 부도유 예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는 기업들이 너도나도 손을 벌릴 텐데 형평성 문 제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는 “기아사태에 잘못 휘말리면 다음 정권에서 청문회에 설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의 행보를 살펴보면 여러 대목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19일 재경원 주재로 기아대책회의를 열고 1만7천여 기아 하청·협력업체들이 보유한 진성어음에 대해서는 금융기관 들이 적극 할인해 주도록 유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아 협력업체들 사이 에서는 진성어음 할인조차 제대로 안 된다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 이 엄연한 현실이다. 관치금융의 악령이 사라졌다고 자부하기 어려운 처 지에 있는 정부의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 종합금융사의 한 간부는 “정부가 별도 대책없이 금융기관들에만 맡기 는 한 하청·협력업체들이 연쇄부도로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비 관적으로 말했다.

“김선홍 퇴진, 아직은 안 된다”

재계나 금융계는 이런 정부의 태도가 결과적으로 경제 전체에 엄청난 충 격을 몰고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쌍용 등 일부그룹의 위기설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또다시 불거진 것도 그 한 예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6월 초 국내 자동차산업의 구조개편 필요성을 강조한 삼성 보고서로 파문이 일었 을 때 민간자율에 의한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전경련이 정부 주도의 자동 차산업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이런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 는 분석이다. 정몽혁 자동차공업협회장(현대자동차 회장)이 최근 자동차 업계의 구조조정은 민간자율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기아사 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융권의 한 간부 는 “정부로서는 기아사태로 휘말리지 않았다고 자위할 수 있을지 모르지 만 기아관련 중소기업은 물론 다른 기업들도 연쇄적인 피해를 피할 수 없 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가 △부동산 3조1천억원어치 매각 △계열사수 28개에서 13개로 축소 △임원 50%를 포함한 5천여명의 인원감축 등을 골자로 한 자구계획을 내 놓았음에도 채권단이 경영책임을 들어 김선홍 회장의 퇴진을 물고늘어진 것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한때 ‘한국의 아이아코카’로 불리던 김 회장 에게 기아부실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다. 그러나 김 회장 퇴진 뒤 기아의 자구계획을 책임지고 추진해나갈 적임자가 마땅치 않다는 데 고민이 있다. 자칫 한보처럼 외부인사가 들어 와 업무파악에만 몇개월이 걸릴 경우 ‘제2의 봉고신화’는 물 건너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기아는 그룹 전체상황과 내부 문제점을 누구보다 소상히 알고 있고 유일하게 리더십을 지니고 있는 김 회장을 중심으로 자 구계획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고 있다. 기아재건의 필수 요건인 해외사업을 순탄하게 전개하는 데도 김 회장의 존재는 필요 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기아 임직원들도 현 시점에서 김 회장의 진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회사 정상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고 김 회장도 이미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기 아와 채권단은 일단 1차 자구계획기간 동안은 김 회장 중심의 체제를 인 정하고 자구가 실패할 경우 전 임원진이 퇴진하는 것으로 절충점을 찾고 있으나 여전히 분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1차 자구계획 이행기간에 대해 채권금융단은 2개월의 부도유예협약기간으로 보는 반면 기아는 부동산 매 각 등에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것을 감안할 때 최소한 6개월 이상은 보장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채권단, 아시아차 매각 고집

기아가 26만평에 이르는 아시아차의 광주공장 부지(상업용지로 용도변경 시 시가 1조5천억∼2조 추정)를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는데도 아시아차 자 체를 팔아야 한다고 채권단이 고집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기아는 3자인 수 추진의 시발점이 아니냐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소형트럭 및 지프 생산시설이 없는 대우가 인수의사를 타진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 고 있는 상황이다. 채권단으로서는 채권회수가 1차 관심사겠지만 단순한 부지매각과 회사 전체 매각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기아는 아시아차가 중형트럭과 프라이드를 생산하고 있어 다른 계열사와는 달리 종합자동차메이커로서의 회사 정상화에 꼭 필요하다는 태도이다.

이런 저간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재계나 금융계에서는 정부가 사실상 기 아를 자연사 직전까지 몰고 가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분석이 중론이다. 이 런 시각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현실과 맞물려 설득력을 갖는다. 정부로서 는 어차피 과다한 설비증설 속에서 내수부진으로 인한 경쟁 심화, 출혈수 출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내 자동차산업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기아 차와 함께 삼성차 문제를 모두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다. 자동차업계에서 는 삼성이 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국내 기존업체의 생산 과잉규모가 2000 년에는 1백8만여대, 2010년에는 1백80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통산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로서는 기아차를 살리면 삼성차를 버려 야 하고, 삼성차를 살리려면 기아차를 버려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한다. 기아차를 살리기 위한 수단도 마땅치 않고 살릴 수 있 다는 확신도 없으며 자칫 특혜시비에 휘말릴 우려가 있는 상황이라면 기 아가 자력갱생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순간까지 방치해 두 었다가, 현실논리를 들어 제3자인수의 수순을 밟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 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또 정부 스스로 기아부실의 한 요인으로 꼽고 있고 기아노조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시킬 수 있는 이점까지 있다. 이미 채권단은 인원감축에 대한 노조의 동의서와, 경영권 제약요인으로 지목돼온 단체협약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재판될 수도

정부가 기아를 특정기업에 인수시키는 각본을 염두에 두고 상황을 계획적 으로 몰고 간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기아그룹의 한 임원 은 “기아의 제3자인수를 주도적으로 도모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만히 놔둬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 속에서 방치하는 것도 각본이기는 마찬 가지”라고 지적했다. 삼성으로 넘기기 위한 미필적 고의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기아 내부에서는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인 이회장 대표와 특정그 룹과의 유착설을 거론하며 이 대표와 가까운 그룹 내 한 고위관계자가 곧 김 회장 대신 회장직에 올라 특정그룹으로 기아를 넘기는 데 교량역을 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 중에서도 현 상황에서는 정 부가 개입을 하든 민간자율방식에 따르든 3자인수라는 기아사태의 최종 종착점은 똑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통산부의 한 고위관계 자는 “다만 최종 결과에 이르는 시간과 그 기간중에 파생되는 경제적 희 생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아의 제3자인수 과정이나 논리가 어떻든 세계 17위의 자동차메 이커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춘 한국 유일의 선 진국형 기업인 기아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 여론을 달래기는 쉽지 않을 전 망이다. 특히 인수업체가 그동안 끊임없이 기아인수설의 진원지로 꼽혀 온 삼성일 경우 그 파장은 노태우 정권 말기 큰 파문을 일으켰던 제2이동 통신 사업자 선정의 재판이 될 가능성마저 있다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주 장이다. 이런 시점에서 기아의 소액주주들과 기아차 및 기산 직원들이 주 주권익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 다. 대선을 앞두고 민심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여야 정치권의 대응방 향도 큰 변수가 되고 있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