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재벌/미원그룹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조미료가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대부분의 창업 1세대들이 그렇긴 하지만 미원그룹 임대홍(77) 명예회장의 검소함은 재계에선 아주 유명하다. 현역시절 그는 출장을 나가도 숙박료 5만원 이상의 숙소에는 묵지 않았다고 한다. 열차도 새마을호는 타지 않 았고, 최근까지도 승용차보다 전철을 더 많이 이용했다. “나는 부자 아 버지를 두지 못했다.” 이유를 묻는 직원들에게 그는 미국의 부호 카네기 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한다. 현역시절의 그는 조미료 미원의 개발자 답게 집에 딸린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일을 무엇보다 큰 기쁨으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도 도미노 속에도 주가 상승세

총수자리를 넘겨받은 지 올해로 만 10년을 맞는 임창욱(49)회장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재벌총수치고 ‘의전’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부 하직원이 차문을 열어주거나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주는 것을 싫어한다. 공식적인 사장단 회의도 1년에 많아야 한두번이다. 요란한 형식을 갖춘 행사는 물론, 사진을 찍는 일조차 싫어해 그룹 비서실 직원들은 언론이 총수나 경영진의 사진을 요청하면 곤혹스러워 한다. 여의도에 미원빌딩이 있지만, 회장 집무실은 여전히 신설동의 6층짜리 낡은 사옥에 자리잡고 있다. “외양보다 내실을 더 중시”하는 임 회장의 스타일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호남기업’이라는 딱지가 기업에게는 무엇보다 무거운 굴레였던 시절, 미원은 그 굴레 속에서 허덕이던 대표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창업자는 사 업은 부산에서 시작했지만 태어나 자란 곳은 전북이다. 70년대 초 야당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풍문으로 한바탕 심한 곤욕을 치르기 도 했다. 그러나 임 명예회장은 “믿을 만한 사람을 찾다보니” 호남출신 인사들을 그룹 고위직에 많이 등용했다. 그래선지 미원그룹은 흔히 진취 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보수성은 상황이 어려울 때면 오히려 미원의 저력으로 작용하곤 했다.

올해 들어 삼미, 진로, 대농에 이어 기아까지 쓰러졌지만, 미원그룹의 주 가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난 7월24일 기준으로 미원그룹 상장 5개 계열사의 평균주가는 4만2천6백60원이다. 연초의 2만1천7백836 원에 비해 두배가 넘는다. 기아사태 때문에 증권시장이 얼어붙기 전에는 최고 137%까지 주가가 올랐다. 이유가 뭘까? 재계에선 “구조조정을 통한 사업다각화와 신기술개발에 잇따라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데 이견이 없 다.

미원그룹은 지난 94년 세원과 그룹을 분리하면서 재계순위 30위권 바깥으 로 밀려났다가 올해 세원그룹과 합병하면서 29위로 재진입했다. 미원 관 계자들은 그러나 자산규모를 기준으로 하는 순위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미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30대 재벌 에 끼어봤자 오히려 각종 제약만 늘 뿐이다.” 그룹 비서실 주홍 홍보팀 장의 말이다.

사람도 줄이고 해외투자도 줄이고…

그는 “그룹을 통합하기로 한 것은 적은 자본금의 세원이 라이신 특수로 엄청난 수익을 내다 보니 인수합병(M&A)을 노리는 국내외 자본이 군침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가축사료에 첨가하는 동물성장촉진 물질인 라이신의 생산설비를 지난해 크게 늘린 세원은 지난해에만 4천7백 억원어치를 팔아 2백10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라이신의 국제가격은 지난 해 t당 2천2백달러에서 올 들어 2배 가까이 올라, 올해에는 모두 1천억원 의 순이익을 낼 전망이다. 광우병 파동으로 라이신의 수요와 가격이 급증 하는 운이 따랐지만, 적시에 생산설비를 확충한 것이 절묘하게 들어맞았 다.

그러나 두 그룹의 합병결정은 무엇보다 세원의 기술력과 건실한 재무구조 , 미원의 첨단제품과 자산을 합쳐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미원그룹은 지난해 말 현재 자기자본비율 19.4%( 부채율 415.4%)로 30대기업 평균 20.1%에도 못미쳤다. 신규공장건설, 해 외사업확대 등에 따른 투자로 금융비용이 크게 늘면서 지난해에만 모두 3 백4억원의 적자를 냈다.

미원은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대폭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불황의 조 짐이 나타나자 일용직 판촉인력 7백여명을 포함해 모두 1천여명의 인력을 줄이는 등 조직을 간편화했다. 당장 필요없는 부동산도 처분했다. 지난해 5월 우성건설의 인수를 포기한 것도 적절했다. 당시 채권단이 제시한 인 수원칙을 거의 모두 받아들여 가장 유력한 인수기업으로 거론되던 미원은 막판에 갑작스레 인수를 포기해 무성한 뒷말을 남기긴 했었다. 그러나 감 당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인수해봤자 회생시킬 수 없다는 게 우성을 포기 한 이유였다는 것이 미원쪽의 설명이다. 우성을 인수한 한일은 결국 올해 손을 들고 말았다. “다시 제의가 오더라도 우성인수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다”는게 미원의 입장이다.

올 들어 국내 스티렌계 합성수지 시장 점유율 1위로 그룹의 주력기업 중 하나인 미원유화(5억8천만원의 적자)를 금호그룹에 팔면서 합성수지 생산 에서 손을 뗀 것도 구조조정의 노력의 하나다. 중국의 사료공장과 조미료 공장,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조미료공장 증설계획을 미루는 등 해외투자 도 줄였다. 내로라 하는 재벌들이 빚을 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다 줄줄이 부도를 내거나, 부도위기에 몰려 있는 요즘 미원의 몸집은 비교적 가뿐하다.

제약사업 잘 나간다

사실 미원도 한때 사세확장 프로그램을 전면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세우기 도 했다. 지난 94년 대대적인 비전 선포식을 가질 때까지만 해도 미원은 의기양양했다. 그룹의 한 임원은 “초지일관 밀어붙였더라면 우리도 틀림 없이 박살났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내실강화쪽으로 급속히 방향을 전환한 것이 오늘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지난 94년 제약사업에 뛰어들면서 사업다각화의 길을 모색한 미원은 신기 술개발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다. 올 들어 일본의 3개 제약사에 1백만달러어치의 항생제를 수출했고, 최근에는 스웨덴의 파머시아사에 이 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혈전치료주사제의 원료인 스트렙토키나제를 개발해 상품화에 성공했다. 시장규모만도 완제품시장에서 2천억원대, 원료시장에 서 3백억원대다. 항생제의 원료인 세파클러가 올 하반기 미국식품의약국 의 승인을 받으면 미원의 제약사업은 다시 한번 도약할 전기를 맞게 되리 라는 게 미원쪽의 설명이다. 발효산업에서도 미국의 뉴트라스위트사가 독 점하다시피 해온 아스파탐을 자체 개발해 미국시장에 진출한 지 2년 만에 3%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아스파탐은 설탕보다 당도가 2백배나 높은 저칼로리 감미료다. 아직은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뉴트라쪽의 덤핑공세 에 별 재미를 못보고 있지만, 생산수준을 현재의 7백t에서 연산 2천t까지 끌어올리면 한번 붙어볼 만하다고 한다. 아스파탐 시장은 미국에서만 연 간 15억달러 규모다.

그러나 미원의 진짜 야심은 다른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미원은 지난해 말 미원통상 안에 소속돼 있는 유통사업본부를 분리해 (주)미원유통을 설립하고 올해부터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원은 첫사업으로 서울 남대문시장 안에 지하 9층 지상 23층, 연면적 1만4천여 평 규모의 패션유통건물을 2000년 완공목표로 올해중 착공할 계획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깊어가는 유통업계의 불황 속에서 미원의 유통업 진출은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다. 무엇보다 지난해 2천52억원을 들여 인수한 ‘삼 풍백화점’ 터가 문제다. 투자비만 1조원 정도가 들어갈 이 터가 그룹을 한바탕 도약의 길로 이끌지 아니면 위기로 몰아넣을지 그룹 관계자들도 장담하지 못한다.

삼풍백화점 터 인수, 도약이냐 위기냐

미원이 야심만만하게 추진하는 또하나의 사업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 공장 부지 개발사업이다. 지난 7월23일 방학동 8만여평의 부지가 서울시로부터 상세계획구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앞으로 체계적인 개발이 이뤄지게 된다. 6천여평은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돼 아파트가 들어선다. 미원은 공장을 옮긴 뒤 이 일대에 첨단 테마파크를 만들 계획이지만, 앞으로 막대한 개 발이익이 기대되는 만큼 특혜시비를 어떻게 벗어나느냐도 넘어야할 숙제 다.

조미료 하나로 40년 동안 국민들의 입맛을 지배해온 미원의 야심은 세원 과 미원을 합병하면서 회사이름을 대상공업(大象工業)으로 바꾸기로 결정 한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미원그룹의 한 관계자는 “명예회장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룹 이름은 그대로 미원으로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 다. 그러나 임 회장이 아버지의 필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주력기업인 (주)미원의 간판까지 바꾸기로 한 것은 이제 2세체제의 정착을 넘어서 사 실상 제2의 창업을 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