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희귀 동식물의 천국, 점봉산 진동계곡을 가다

개발바람이 온 산하를 파헤치는 현실에서 ‘원시림’이란 단어는 낯설기 만 하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인간의 발길에 맞서 태고적 신비를 위태롭게나마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다. ‘남한 최후의 원시림’ ‘거대한 녹색탱크’ ‘희귀 고산식물의 천국’라는 수식어가 전혀 지나 치지 않는 점봉산 진동계곡이 바로 그곳이다. 남설악 끝자락인 가칠봉(1, 165m)과 점봉산(1,424m) 북암령(925m)에 둘러싸인 오지인 까닭에 진동계 곡은 인간의 손때를 피해 자연이 만들어낸 수백년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 할 수 있었다.

망초 흰꽃 장관, 한여름 눈이 내렸나

계곡 어느 곳으로 발을 들이든 하늘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수목 들이 울창하다. 수목들 사이엔 지름 2m가 넘는 신갈나무와 전나무 군락이 펼쳐지고 밑바닥 축축한 땅에서는 희귀식물들이 무더기로 자란다.

지난 7월말 <한겨레21> 취재진은 진동계곡의 식물생태를 여러 차례 탐구해온 현진오 박사(식물분류학·<사람과 산> 편집장)와 언제 파헤 쳐질지 모르는 이 원시의 자연을 찾았다.

오전인데도 한 여름의 햇살이 피부를 따갑게 찌른다. 진동계곡 마지막 인 가인 해발 750m 고지의 인제군 기린면 삼거리를 출발해 오색약수터로 통 하는 길목인 단목령을 따라 10여분 오르다 진동계곡의 무수한 생명을 예 고하는 너르니 골짜기로 접어 들었다. 초입부터 야생 당귀와 어깨를 족히 넘을 만큼 자란 망초의 흰꽃이 뒤섞인 수백평의 드넓은 초지가 장관이다. 한여름 산속 분지가 흰눈에 덮인듯 눈부시다. 산들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계곡 전체가 하얀 포말을 이고 넘실대는 파도 같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진동계곡이 간직한 생태적 가치를 알리는 자그마한 맛뵈기에 불과했다. 계곡의 북동쪽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난 나물꾼들의 길 아닌 길을 타고 4 0여분을 오르자 점봉산 진동계곡이 숨겨 놓은 희귀식물들의 대규모 군락 이 하나둘 자태를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계곡 경사 면의 바위틈에 대규모 군락을 이룬 도깨비부채였다. 연꽃잎만한 크기의 잎들을 날카롭게 사방으로 펼친 모습이 마치 도깨비부채 같다고 하여 이 름붙여졌다. 도깨비부채는 환경부가 지정한 특정야생식물로 설악산 일부 지역과 이곳 진동계곡 일대에서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는 희귀종이다. 그 사이엔 역시 특정야생식물로 지정된 관중이 60∼70cm 크기로 자라고 있었다. 고사리과 식물로 꼭 야자수잎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곳은 원시 생태계를 그대로 간직했다고 할 수 없다.” 현진오 박사의 단호한 지적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9백고지인 너르니까지는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로 인해 식생이 많이 훼손됐다” 고 현 박사는 설명했다. 그 이상의 고지로 올라야 원시 생태계의 참모습 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0여분을 더 오르자 해발 9백고지에 잡목들과 들풀로 뒤덮인 수천평의 평원이 그야말로 꿈처럼 다가온다. 5공 당시 정 계의 한 실력자가 헬기를 타고 가다 원시림 한가운데 펼쳐진 이 평원을 보고 스키장 등 위락시설을 만들고 새마을연수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추진 했던 니르니다. 너르니가 인간에 의해 짓밟힐 뻔했던 첫 위기였다. 다행 히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발 덕분에 개발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계곡 안에선 하늘을 볼 수 없다

(사진/쓰러진 신갈나무의 썩은 몽뚱이에서는 표고버섯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너르니를 지나 한시간쯤 더 오르자 본격적인 원시 생태계가 눈앞에 펼쳐 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아름드리 전나무숲이 취재진을 가로막는다. 국 내에서 둘레가 1m를 넘는 자연생 전나무 군락을 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는 게 관련 학자들의 설명이다. 전나무 군락을 헤치며 비탈 을 오르던 취재진은 다시 한번 놀랐다.

해발고도 1천m를 넘어서자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 사이로 진동계곡의 참주 인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진동계곡 식물생태계의 우점종을 이루고 있는 신갈나무 거목들이 정상부를 향해 어른 서너명이 손을 맞잡고 둘러 싸야 겨우 껴안을 정도의 아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 가지를 타고 50∼6 0m 높이로 치솟아 치렁치렁 잎을 늘어뜨린 다래덩굴마저 지름이 15cm는 족히 넘었다. 엄지손가락의 굵기 정도로만 기억하던 우리에게 그것은 충 격이었다. 하늘은 그 너른 잎사귀로 가려져 마치 열대우림을 연상케했다. 실제 한낮인데도 계곡 안에서는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수차례나 이곳을 다녀간 현 박사지만 “인간의 손길을 피해 몇백년은 족히 자랐을 것”이 라며 감격에 젖어든다.

원시림의 장관은 여기에 그치치 않는다. 눈과 비바람에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신갈나무 한그루가 넘어지면서 정상부에서부터 계곡을 향해 마치 도 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쓰러진 수십그루의 신갈나무 전나무 거제수나무 고 사목들이 푸른 이끼를 뒤집어쓴 채 길게 누워 있다. 쓰러진 거목의 썩은 몸뚱아리에는 밤색의 표고버섯과 고란초과의 산일엽초가 짙푸른 싹을 틔 우고 있었다.

거목들이 뿌리내린 땅은 이미 흙이 아닌 거대한 습지였다. 짙은 갈색의 부식토들이 20cm 이상씩 쌓여 발길이 닫는 곳마다 그 부식토가 뿜어내는 물기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이런 부식토가 자연에서 1cm 쌓이는 데는 적 어도 1백년이 걸린다는게 현 박사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2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땅인 셈이다.

이쯤 되면 희귀식물을 애써 찾으려 할 필요조차 없다. 지천으로 널린 게 환경부가 특정야생식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희귀종들이다. 허리춤까 지 자란 갖가지 희귀종들은 오가는 사람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취재진도 그들이 간직한 신비와 삶의 역사를 밟는 게 못내 안타깝다. 환경부가 특 정야생식물 9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금강애기나리가 군락을 이루는가 하면 금강초롱 금강제비꽃 갈퀴현호색 등이 각각의 영토를 점한 채 살아 가고 있다. 개울가 비탈에는 설악산과 점봉산 일대에만 서식하는 희귀식 물인 두실바이취가 솜털까지 드러낸 흰꽃을 자지러진다. 축축한 흙바닥에 는 애기앉은부채가 고깔모양의 진한 자주색 꽃망울을 땅 위로 힘겹게 내 밀고 있다.

9백여종 서식, 식물자원의 보고

진동계곡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식물종들이 삶을 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진오 박사 는 “진동계곡 주골짜기인 너른리골과 강선리골은 식물분류학자들도 발길 을 들여놓기 어려운 오지라서 제대로 연구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최근에야 서울대 이도원 교수가 진동계곡을 평생의 연구대상으로 정하고 연구를 진행중이며 임업연구원 이병천 박사 등 몇몇 학자들이 이곳의 가 치를 검증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연구를 토대로 학계는 진동계곡 일대에는 9백∼9백50여 종류의 식 물이 서식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일대의 식생을 계속 추적 해온 한국식물원협회 오병훈 이사는 “한반도에 서식하는 식물(3천5백∼4 천여 종류)종의 약 20%에 해당하는 8백50여종이 자라는 식물자원의 보고 ”라고 평가한다. 특히 그는 “진동계곡을 중심으로 한 점봉산 일대에서 확인한 환경부 지정 특정야생식물만도 한계령풀,기생꽃, 땃드릅나무 등 2 0여종에 이른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전체 보호식물이 126종이라는 사실 에 비춰보면 단위 면적당 법정보호식물이 가장 많은 셈이다. 학계에서는 적어도 천마 등 30여종의 특정야생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계곡 전체가 온대중부의 기후를 이루면서도 일부 고산지대를 중심으 로 온대북부 기후가 교차되면서 만들어진 기후와 토양조건 아래서 생태계 가 3백∼4백년 동안 지속되면서 천연림의 ‘극상’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 다. 더욱이 다른 계곡과는 달리 산불이나 벌채 등 대규모 산림훼손도 일 어나지 않았다.

이런 조건 아래서 진동계곡은 그 종류만큼이나 가치있는 것들을 곳곳에 숨기고 있다. 그 속에는 모데미풀이나 금강초롱꽃 금강애기나리 등 36종 의 한국 특산종이 포함돼 있다. 현 박사는 “식물 속 자체가 한국특산종 으로 분류돼 있는 5가지 가운데 세 가지가 이곳 진동계곡에 자라고 있다 ”고 그 가치를 말한다. 모데미풀 속, 금강인가목 속, 금강초롱 속이 그 것들이다. 나머지 콩과식물의 일종인 개느삼 속이 강원도 양구지역에, 미 선나무 속이 괴산지역에 서식하고 있다.

흡혈 진드기의 ‘접근 금지’ 경고

식물생태학적 연구가치 또한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개울가 주 변과 계곡물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습지에서 봄이면 흰꽃을 피우는 희귀특 산종인 모데미풀의 경우 그동안 지리산 운봉과 제주도에서만 발견돼 남쪽 에만 서식하는 식물로 알려졌었다. 그러다 이곳 너른리 계곡에서 대규모 군락지가 발견되면서 진동계곡이 그 북방한계선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지난해에 진동계곡의 북동사면을 이루는 북암령 정상부근에는 역시 희 귀종인 한계령풀 최대군락지(8백여 평방m)가 발견돼 학계와 환경단체에서 는 이 지역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것만이 아니다. 또하나의 주계곡인 강선리골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쓴 바위와 고사목이 썩어가고 있는 습지 곳곳에서 제주도와 강원도의 깊은 산 속에서 자라는 속새군락이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1천2백고지인 곰배 령 정상 부근에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들이 군락을 이루 고 있었다. 안으로 썩어가더라도 푸른 이끼를 머금은 채 푸르름을 뽐내는 주목들의 둘레는 3m를 넘었다. 신갈나무가 우점종을 이루고 물푸레나무, 까치박달나무, 서어나무 군락이 산높이에 따라 다르게 분포하는 진동계곡 에서는 해발 1천m가 넘는 점봉산 정상과 곰배령쪽에서만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남한 최후의 원시림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 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지 식물생태의 가치만 있는 게 아니다. 직접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 었지만 자연보존협회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진동계곡에는 천연기념물 인 하늘다람쥐와 사향노루 산양 수달 등 희귀동물이 상당수 서식하고 있 는 것으로 전한다. 일부 주민들은 반달곰이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산 곳 곳에 멧돼지의 흔적을 발견하거나 진동천 부근에서 수달의 배설물은 간단 없이 눈에 띈다.

진동계곡이 이런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찾을 수 없는 오지였기 때문었다. 고산준령에 둘러싸인 채 인간의 발길을 가로 막을 정도로 우건진 숲이 스스로 자신을 지켜온 것이다. 실제 취재진도 너른리와 강선리골을 타고 정상을 오르다 우거진 숲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없어 등정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았다. 또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흡혈 진 드기는 사람의 살갗 깊숙이 파고들며 접근자들에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 다. 일행 중 일부도 진드기가 파고들어 칼로 파내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그 천연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

하지만 진동계곡이 얼마나 더 그 원시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지 아무도 약속할 수 없다. 한국전력의 양수발전소와 교통편의를 내세운 조침령 도 로 관통 등 개발논리를 앞세운 인간의 손길이 점점 계곡의 심장부를 향해 쳐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대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해온 임업연구원 이병천 박 사는 ‘점봉산 산림군락구조 및 분포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 수종의 종류 및 분포 모양을 달리하는 다양한 생태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며 “이 지역은 한반도 안에서 생물종 다양성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적고 있다. 진동계곡은 미래의 자원인 희귀동식물이 그 가치를 조명받기 도 전에 하나둘 멸종의 길을 걷고 있는 한반도에서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