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설피밭을 등질 수 없어라”

진동계곡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인 이곳까지 닿는 대중교통편은 전혀 없다. 진동리 사람들 에게는 도회지로 불리는 기린면 현리에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 산길로 40 여분을 달리면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불리는 귀둔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점봉산 남서쪽 사면의 곰배령을 넘거나 양양군 서면 마산리 오색초등학교 에서 출발해 오색천을 거쳐 단목령(박달재)을 넘는 방법이 있다. 모두 한 시간 반은 족히 걸어야 한다. 최근에는 현리에서 진동천을 옆으로 끼고 비탈길이 뚫려 승용차로 한시간이면 진동리 한가운데인 설피밭에 닿을 수 있다.

아무리 오지라도 사람들은 희귀종과 마찬가지로 터잡아 살아가는 법.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 진동천을 따라오르며 3∼4km 간격으로 검게 녹슨 함 석지붕을 이고 사는 인가들이 하나씩 나타나고 사라진다. 진동계곡 초입 에 해당되는 진흙동. 7백∼8백m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절해고도 한가운데 신비롭게 펼쳐진 3천여평의 평야 한쪽에 흙벽돌로 집을 짓고 사는 이경준 (80)씨는 “90리 진동계곡을 다 합치면 30여가구쯤 될 것”이라고 말한다 . 그는 아직도 소 두 마리가 한쟁기를 끄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황소 한 마리 힘으로는 돌밭을 일궈 낼 수 없기 때문이란다.

첩첩산골 척박한 돌밭뿐인 이곳에서 논농사는 애당초 꿈도 꾸지 못한다. 진동계곡 곳곳에서 자라는 한약재인 야생 당귀 씨앗을 받아 밭에서 싹을 틔우는 당귀 농사와 토종벌이 이들의 밥줄을 이어주는 소득원이다. 몇몇 은 염소를 키우거나 황귀 천궁 등 약초 재배를 곁들이기도 한다.

진동계곡 최고의 명물은 아무래도 마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설피밭 이다. 가칠봉과 점봉산 단목령 북악령 등 고산준령이 둘러싸고 만들어낸 삼태기 모양의 평지가 펼쳐진 이곳에는 유난히 눈이 많다. 보통 10월이면 겨울이 시작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이듬해 3월까지 멈출 줄 모른단다. 한번 내린 눈은 한길을 넘기 일쑤라 설피없이 는 다닐 수 없다고 해 설피밭이란 이름이 붙었다. 설피는 눈 위를 걸을 때 빠지지 않도록 신는 덧신이다. 물푸레나무나 다래나무를 지름 30cm 크 기로 둥굴게 구워 만든 틀에 가죽끈을 이었다. 진동천 주변 30여 가구의 지붕이 하나같이 녹슨 함석으로 만들어진 것도 다 눈이 잘 미끄러져 내리 도록 하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당귀와 흰색 망초꽃 평원이 펼쳐지는 설피밭 가운 데 마을의 희망인 학교가 있다. 방동초등학교 진동분교. 5학년 박진영, 4 학년 마정아, 2학년 마정선 3명의 학생과 2명의 선생님이 이곳을 지킨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그나마 이곳을 등지지 않는 것은 학교가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진동계곡 사람들은 3년 전 학생도 없는 학교를 6개월 동안이나 고집스레 지켰고 한 아이를 조기입학시켜 살려냈 다. 이원섭(61) 선생님도 “젊은이들이 남아 있는 한 폐교는 안 될 말” 이라며 웃음을 짓는다.

이곳에 또다른 명물 바람불이. 현리에서 진동천의 협곡을 타고 10여km 들 어가면 갑자기 나타나는 드넓은 목초평원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거센 북서 풍이 분다. 꽃창포와 갯버들, 이름모를 수많은 초목이 한결같이 바람부는 쪽으로 누워있다. 거센 바람을 맞받는 산 중턱에는 주변 원시림과는 달리 아직도 나무들이 조그마한 관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곳은 아직 희망이 있다. 때로는 원시림의 풍경에 반해 또는 농 사를 짓겠다며 하나둘 젊은이들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7월12일에도 8백고 지인 강선리 골짜기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왔다는 한 신혼부부가 자그마한 함석지붕을 올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겠다”는 것이다. 원시 림만 지켜진다면 진동계곡 사람들은 이곳을 등지지 않을 것이라고들 말한 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