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진보민주진영 대선전략

(사진/7월24일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 민주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12월 대선에 개혁적인 후보를 낼 것을 결의했다.)

10만여명 이상이 참여하는 실질적인 국민경선제로 진보민주진영 전체가 합의·추대하는 ‘국민후보’를 선출한다. 이를 통해 민주적인 정권교체 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룬다. <한겨레21>이 단독 입수한 '희망21' 이라는 제목의 민족민주진영의 대선전략보고서안의 뼈대다.

진보민주진영 30대 핵심 참모들이 입안

이 보고서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위원장 권영길), 민주주 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상임의장 이창복), 진보적 정치운동단체, 시민운동·환경운동단체 등 진보민주진영의 30대 핵심 정책브레인들에 의 해 작성됐다. 이들로 구성된 이른바 ‘광화문 모임’은 노동법사태 이후 지속적인 모임과 토론, 그리고 부문별 합의를 바탕으로 이 보고서를 성안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15대 대선의 개요 및 의의, 상황분석, 국 민후보 전략, 단계별 추진계획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거운동의 정책 과 방향은 물론 투표일까지의 상세한 선거계획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우선 국민후보가 최소 1백50만표(유효투표자의 7% 안팎)에서 최 대 3백만표(유효투표자의 15% 안팎)까지 얻을 수 있다는 전망에서 출발한 다. 이는 민주진영이 98년이나 99년 초까지 진보적 개혁정당을 추진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의미한다. 기성정치권의 정치행태에 염증을 느끼는 부동층을 감안할 때 진보민주진영 전체가 조직적으로 후보를 합의해 선출 할 경우 상당 수준의 국민후보 바람과 함께 부동층을 흡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 분석이다. 이때 국민후보는 득표력 이외에 대선 구도 자체를 크게 흔들어놓을 수 있는 변수로서의 역할도 예상된다.

지금까지 진보민주진영의 대선 준비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진행돼왔다. 87 년과 92년 대선 때마다 진보민주진영이 겪어온 극심한 분열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14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한 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 부문별 대중조직과 지역의 민족민주운동 세력을 포괄하고 있는 전국연합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민주적 정권교 체와 정치세력화를 위해 국민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뒤이어 7월24일에 는 민주노총이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진정한 민주개혁을 위해 각계 민주 세력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후보’를 내기로 결정 했다. 정치적 지도력과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전국연합과 대중적인 영향 력이 큰 민주노총이 공동보조를 취할 조직적 준비가 마무리된 셈이다. 진 보민주진영은 오는 8월11일 국민후보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 고, 9월1일에는 국민후보 준비위원회를 공식적으로 발족해 공동선거기구 구성을 본격화한다.

9월1일 국민후보 준비위원회 발족

보고서가 담고있는 진보민주진영의 선거전략과 선거일정에 따른 대책은 치밀하다. 먼저 이번 대선의 총 유효투표수를 대략 2천4백만명(75% 유효 투표 기준)으로 잡았다. 이는 92년 14대 대선이 81.9%의 투표율, 14대 총 선이 63.9%를 보인 것 따위를 종합 분석해 도출한 수치이다.

이어 보고서가 밝힌 15대 대선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대선은 누가 당선되느냐와 관계없이 3김시대의 종료와 차세대 정치체제의 출범을 공식화하는 자리다. 따라서 3김 이후를 노리는 여러 신진세력의 쟁투와 진출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둘째, 98년 지자체 선거와 2000년 총 선으로 구체화될 정계 구조개편의 토대가 된다. 차기 정권에의 지분 참여 와 국민적 지지 확보 정도가 이후 선거와 정계개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다. 세째, 재벌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안착 여부가 판가름난다. “최근의 경제위기에 따라 대부분의 예비후보들이 비용절감을 핵심 내용 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번 대선은 지난 수십년간 한국자본주의를 이끌어온 국가 주도의 관치경제가 재벌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방임경제로 이행하는가 또는 다른 양식의 경제체제로 가는 가를 판가름하는 장”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밖에 “97년 총파업 성 과를 온전히 축적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87년 6월항쟁 이후 진 보민주운동의 10년 활동을 결산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정세 각 진영의 대응을 이렇게 설 명했다. 경제상황은 80년 이후 최악의 불황이 이어지며 사회심리적 공황 증세 확산과 구조적 고용 불안 현상이 팽배한 위기 국면이다. 이에 따라 기성정치권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과 공동체적 집합의식의 해체와 개인주 의의 확산, 정치 무지에서 정치 냉소로 이행하는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다 . 이와함께 진보민주진영 역시 대중운동과 부문운동, 민중운동과 시민운 동으로의 분화가 급격히 이뤄지고 있고, 원칙적 대기론과 장기적 정치세 력화론 등 현재의 국민후보론을 잠재적으로 반대하는 논리가 일부 상존할 것으로 내다봤다.

보고서는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진보민주진영이 동원할 수 있는 가능한 인적 자원을 총 조직원 기준으로 54만1천명으로 추정했다. 즉, 민주노총 50만명, 전국연합 4만명(한총련과 전교조 제외), 진보적 정치단체 1천명 이라는 계산이다. 10만원 정도의 지원금을 납부하고 적극적이고 규칙적으 로 선거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인력은 3만6천명(민주노총 2만5천명, 전국 연합 1만명, 진보적 정치단체 1천명)으로 추정했다. “이들이 10만원씩만 내면 36억원은 쉽게 거둘 수 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또 “여기에 합류단체와 국민성금, 각계의 지원금까지 합하면 1백억원 수준의 동원은 어렵지 않다”는 계산이다. 또 이들 인력이 두 차례의 대선을 치른 경험 을 가진 젊고 유능한 인력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강점으로 꼽았다.

진보민주진영의 정치적 시민권 획득이 목표

선거운동의 기본전략은 먼저 기존의 정치구도를 규정해온 민주-반민주 구 도는 퇴장을 전제로 세워진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이른바 ‘상대적 진보성’이 사라지고 여야를 막론하고 예비후보군 대다수가 대동소이한 보수적인 정책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 점, 또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를 둘러 싼 갈등이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점 역시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어렵게 하는 측면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투자 대비 효과가 거의 전무한 보수정치권에 대한 수혈자로서의 구실을 끝내고 진보민주진 영의 독자적 이해와 목표에 따라 대선에 임해야 한다”고 못박고 “우리 의 목표는 진보민주진영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와 정치적 시민권의 획득” 이라고 밝히고 있다. 선거전략의 또다른 중요한 내용으로 △민주진보진영 의 독립과 통일단결 △독립적 후보 출마를 통한 정치세력화 △사회 전반 의 보수화 흐름 저지 등을 꼽고 있다.

14대 대선에 출마했던 민중후보의 패인 분석도 흥미롭다. 보고서는 92년 민중후보의 패인으로 △대표성과 상징성을 상실한 민주진보진영의 분열 △득표 전략보다는 추상적인 구호에 의존하는 운동주체만의 자족적인 선 거운동 △중앙정치력이 부족해 언론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지역본부에 과 중한 역할을 떠맡긴 역량배치의 착오 △선거후 조직화로 이어지지 못한 일관된 계획과 체계의 부재 등을 꼽았다. 이와 관련해 한 관계자는 “과 거 민중후보가 깃발을 세우고 모두 거기에 따라오라고 한 것인데 비해, 국민후보는 국민을 설득할 장치를 마련하면서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뜻에 서 나온 개념”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몇 사람이 모여 하는 자족적 인 운동권만의 내부행사가 아니라 국민적 호응을 얻는 과정이 될 것”이 라고 내다봤다.

보고서에는 진보민주진영 후보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3대원칙도 포함돼 있다. 제1의 원칙은 차별화다. 보고서는 “정치상품의 1차적 구매요인이 차별화”라고 못박으면서 국민후보는 진보적 개혁정책을 뚜렷이 부각시켜 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두번째로는 대안화의 원칙이다. 자신들의 존재를 즉자적 반대세력이 아닌 대체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는 온건화의 원칙이다. 강경, 친북, 폭력 이미지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본다. 전체적으로는 국민후보의 이미지를 온건진 보로 놓고, 온건보수와 강경보수를 내세우는 다른 후보들과 확실한 차별 성을 부각시킨다는 전략이다.

보고서는 이밖에 이번 대선 이후 앞으로 2000년까지의 정치일정에서 진보 민주진영이 단일한 정치프로그램과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했다. 최소한 99년 초까지는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한 것이다. 이는 지자체 선거와 창당에 이르는 일관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과, 지자체 선거후보가 지역의 선거운동을 관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에서 구체화된다. 진보정당 건설과 관련해 한 관계자는 “수 십년 전통을 가진 진보민주세력이 환골탈태해 달라진 환경 속에서 거듭나 는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는 대선에서 가동했던 조직으로 대응하고 98년 하반기나 99년 상반기에는 이 조직이 정당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밝혔다 .

국민경선제 실시로 국민후보 선출

진보민주진영은 9월 이후 ‘민주개혁국민연합’(가칭)이라는 공동선거대 책기구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 기구는 개인가입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결 사체로 민주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뜻을 같이하는 국민들은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 선거대책기구는 주비위(5백명)-준비위(5천명)-공식 발족 (10만명)의 과정을 통해 확대 발전시킬 방침이다. 또 일반 대중의 가입이 자유로운 개방적인 조직구조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특히 중점을 두는 부분은 국민경선제의 내실에 있다. 국민경선제 는 진보민주진영의 국민후보를 경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1천원씩을 받아 조직원으로 가입하게 하고 예비후보 경선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 민후보로 선정될 인물을 1차적으로 국민들이 직접 검증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이 넘어야 할 산은 높고 많다. 여전히 재야 각 부문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이미 2차례에 걸쳐 “민주노 총의 후보가 나오면 안 된다”는 말로 공개적인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다. 또 정권교체에 더 강조점을 두는 인사들은 정치세력화 시기상조론을 내세 우며 난색을 짓는다. 지난 대선 때마다 항상 들어오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비판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자칫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대중조직의 분열 등의 심각한 후유증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또 밖으로는 대중조직을 이용해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부담이다. 소중한 한표의 주권 행사를 조직의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일선에서 선거운동을 책임져야 할 대중조직의 간 부들에게는 더없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칫 대중조직에 분란 을 일으킨다면 진보민주진영은 과거의 쓰라린 분열의 경험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25억원이라는 지정기탁금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진보민주진영의 대세는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대한민 국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한 정치적 대오를 형성해 대선에 참여하는 역사 적인 실험에 들어갔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