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서커스단장 폴 리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세계가 반기는 서커스 인생

로얄런던서커스단에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묘기가 있다. 지름 7m짜리 원통 안에서 오토바이 4대가 엇갈리며 질주하는 기술이다. 중간에 자전거 까지 한대 들어가 아슬아슬한 순간을 연출한다. 누구 하나라도 까딱 실수 하면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묘기다. 서커스단장 폴 리(Pole L ee·53)는 이 묘기가 펼쳐질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고 한다.

폴은 3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서커스단에서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30년 동안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미스 월 드 선발대회 디렉터를 지냈고, 미스 아시아태평양 선발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지난 83년 로얄런던서커스에 합류한 뒤, 5년 만에 단장에 올랐다. 부인은 서커스단의 경리를 맡고 있고, 아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서커스단 법률고문을 하고 있다. 그의 인생이 서커스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단원들을 이끌고 세계를 떠돈다. 한 나라에서 1년 이상 머물기도 한 다. 공연 도중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 재간꾼들을 만나면 기쁜 마음으 로 식구로 받아들인다. 한국에서도 그런 인연이 맺어지기를 바란다. 솔직 히 기대도 크다. 지난 84년 세계서커스페스티벌에서 북한 대표들이 보여 준 묘기에 감탄해서다. 날으는 그네 종목에서 북한 선수가 1등을 하는 것 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을 떠돌다보니 집시처럼 산다. 트럭 뒤에 집을 달고 다닐 정도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사정을 감안하면 안성맞춤이다. 미국에서 특 수제작한 이 집은 충격을 흡수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에 이동시 훼손될 우 려가 없다고 한다. 커튼이나 카펫 같은 실내장식에서 식기에 이르기까지 호텔 뺨치는 수준이다.

그는 서커스생활이 즐겁다. 여러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단원들의 국적이 다양해 처음엔 화합을 이끌어내는 게 힘들었지 만, 공연을 하다보니 지금은 척하면 아는 사이가 됐다. 단원들은 공연을 같이 한 사람들과 파티도 열고 축구대회도 하면서 여로를 달랜다.

단원들은 하나같이 서커스의 귀재들이다. 사자와 호랑이를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압둘 고마리(39)는 7세 때부터 서커스를 시작해 스턴트맨으로 007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다. 공중발레를 공연하는 안드레이(27)는 유럽주니 어기계체조 챔피언으로 연습 도중 다리 부상 때문에 서커스로 돌았다. 광 대이자 공중그네 연기자인 바벨리토(48)는 30년 동안 서커스를 해온 명인 으로, 여덟살배기 큰아들은 최연소 공중그네 묘기기록을 갖고 있다.

폴은 서커스 공연장이 만원일 때 가장 행복하다. 한국 관객은 박수와 웃 음이 인색하지 않아 더욱 기쁘단다. “관객들의 호응은 서커스단원들에게 최고의 보너스입니다.” 로열런던서커스단은 지난 7월4일부터 오는 11월2 0일까지 한국 순회공연을 펼친다. (문의: 02-761-6862)

유강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