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시인 최영미가 공개하는 ‘사노맹 구속’ 백태웅과의 편지 인연

최영미/ 시인

정치권에서 전두환·노태우씨의 특별사면이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7 월24일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 1백40여명은 ‘내란죄의 수괴인 전· 노씨 사면을 거론하기 앞서 5, 6공 양심수들의 사면 석방 문제가 먼저 고 려돼야 한다’는 취지로 법무부에 백태웅(35)씨의 사면청원서를 냈다. 백 씨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씨와 함께 이른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 맹)사건으로 지난 92년 구속돼 15년형을 선고받고 현재까지 6년째 복역중 이다. 백씨의 석방운동과 관련해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 미(36)씨가 <한겨레21>에 글을 보내왔다. 최씨는 최근 3년 동안 백씨 와 편지를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그는 “백씨를 비롯 남조선노동당 사건의 황인욱씨 등 양심수들의 석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백 씨 가족의 동의를 얻어 편지내용을 공개하기로 했다”며 옥중의 양심수들 에 대한 국민들의 따뜻한 관심을 호소했다. 편집자

1997년 여름,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그 편지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원 주 우체국 사서함 87-1000. 그리고 또하나-대구 화원 우체국 사서함 1-31 17이라고 주소 대신 일련의 번호들이 적힌 두통의 발신인은 감옥에 있는 백태웅과 황인욱이다. 이제는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그 아라비아 숫자들 이 내겐 여전히 낯설다. 이름을 뺏기고 번호로만 남은 사람들, 이 유치찬 란한 총천연색으로 들뜬 세기말에 흑백의 수의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자신들의 남다른 신념을 표현하고, 그 신념을 조직했다는 이유 하나로 시퍼런 청춘을 저당잡혀야 하는 이들- 우리는 그들을 양심수라고 부른다. 그래, ‘그들’이 아직도 ‘거기’에 있지. 수인(囚人)번호가 찍 힌 봉투를 뜯을 때마다 난 늘 만감이 교차한다. 와락, 반가우면서도 동시 에 철렁, 가슴 한켠이 쓰리다. 글로만 교제하는 내가 이런데 하물며 그들 의 가족과 아내들은 어떠할까? 이 찜통더위에 그들을 뒷바라지하랴 석방 운동하랴 땀을 흘리고 있을 사람들에 생각이 미치자 잠시 아득해진다. 내 고민만 싸안고 살기에도 벅찬 지난 몇년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했어야 하 지 않았을까?

백태웅과 황인욱, 우연히 맺어진 인연

유럽을 세차례나 드나들면서도 난 대구에 있는 인욱을 단 한번 면회갔을 뿐, 원주에 있는 백태웅과는 아직 얼굴 한번 마주한 적이 없다. 근 3년 넘게 서신왕래를 한 사이인데도 말이다. 신문에선 전두환, 노태우 두 전 직 대통령의 사면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었다. 이럴 수가…. 5, 6공 의 폭압적 정권이 양산한 양심수들은 벌써 5∼6년 넘게 감옥에서 썩고 있 는데, 전·노씨는 들어간 지 얼마 됐다고 벌써 풀어준다 어쩐다 시끄러우 니…. 도대체 어떻게 돼가는 세상인가.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환 멸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더이상 놀라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던 나였지 만, 이번에는 그저 혀만 끌끌차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온 편지들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의 이런 뒤늦은 반성 의 결과이다. 그게 얼마나 그들에게, 그들의 석방운동에 도움이 될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그 두 사람과의 인연은 어느 날 우연히 시작되었다. 남조선노동당 사건으 로 수감중인 황인욱과는 최근에 핀란드에 계신 이인호 대사님의 부탁으로 내 책을 부치면서, 그리고 백태웅과는 94년 겨울에 그가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은 소감을 담은 새해 연하장을 보내오면서 서로 소 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대학 4년 후배인 인욱과는 예전에 오며가며 서너 번 마주친 사이지만, 백태웅과는 속세의 어느 거리에서도 부딪친 적이 없 는 생판 ‘남’이었다. 한때 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세칭 ‘사노맹 사건’의 총책으로 널리 알려진 그를 그간 풍문으로만 접했을 뿐.

‘가고파’ 악보 붙들고 노래 연습

(사진/92년 사노맹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투옥되던 백태웅씨. 15년을 선고받고 현재 6년째 복역중이다.)

“안녕하세요. 최영미 선생님! 멀리서 안부 인사 드립니다”로 씩씩하게( ?) 시작되는 그의 첫 엽서를 읽으며 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잔치 현 장을 떠나지 못하고 아직 그릇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나를, 내 시를 가슴 으로 읽어준 그가 고마웠다. 그 무시무시한(?) 조직사건의 주모자요, 80 년대 운동권의 이론투쟁을 주도했던 장본인 답지 않게, 그는 뜻밖에도 여 리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아침부터 이은상 작시 김동진 작곡의 ‘가고파’ 악보를 붙들고 노래를 익히느라 끙끙대고 있습니다. 가르쳐줄 사람은 없고 그나마 악기도 없이 악보만으로 노래를 불러 보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으뜸을 잡고 손으로 박자 맞추어가며 계명으로 부르는데….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그러다가 갑자기 사장조가 라장조로 바뀌어 음을 잡기가 어려워진다고 고 백하는 그, 징역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을 해서 매일매일 즐겁게 살고 있다 며 “모두들 세상살이 힘들다고 난리인데 저만 너무 유유자적하는 건 아 닌가”고 미안해 하는 그 앞에서 난 할 말을 잊는다. 애써 밝은 소식만 전하려는 그의 고운 마음씨가 행간에서 절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5평 의 독방에 갇혀 있는 그가 때로는 26평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만든 감옥에 매여 허둥대는 나보다 더 여유있게 현실을 살아내는 게 아닌지.

글을 주고받았다고 하나, 난 주로 받는 편이었다.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눌러 쓴 그의 긴 편지를 받으면 난 늘 대충대충 휘갈긴 ‘삐뚤체’로 짧 게 응답하곤 했다. 그것도 꼭 한두달 늦게, 때로는 1년 만에 문득 생각났 다는 듯이, 겨우 답장을 보낸 적도 있다. 그처럼 내가 게으름을 피웠던 것은, 거기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나처럼 잡스러운 인간이 그처럼 순 결한 영혼과 어떻게 만나질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와 부끄러움이 컸던 탓이다.

드문드문 소식이 오고가는 사이에 1년이 가고 2년,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나는 감옥에서 온 편지들을 따로 담아 보관하게 되었 다. 그리고 가끔씩 서랍을 열어 그 철지난 소식들을 천천히 다시 음미한 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옳은 건지, 지치고 헷갈릴 때마다 난 그의 말 을 기억하고 싶다.

그들을 이제 만나고 싶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을 좀더 밝고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순수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 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대에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던 사람들 이 이제는 열정을 안으로 갈무리하여 숯불처럼 은은한 연기로 세상을 달 구며 이끌어 갔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구요.” 27, 29세의 시퍼렇게 젊은 나이에 영어(囹圄)의 몸이 된 태웅과 인욱. 그 들도 이제 서른 중반. 더이상 젊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생의 문턱에 와 있 다. 어서 빨리 대낮의 햇살 아래 그들의 손을 반갑게 잡고 싶은 마음 간 절하다. 인욱의 말마따나 “단절해야 할 것은 깨끗이 단절하고 부정할 것 은 과감히 부정하면서” 그들 각자 자신들의 길을 가기를… 그래서 우리 가 사는 이 세상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한몫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