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김윤환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한겨레21

킹 메이커 김윤환

(사진/"영남후보는 안된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정치적 기반이 약한 이회창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한 김윤환 고문. 대세와 순리를 따르는 정치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권력의 양지만을 좇는 정치인이라는 비난이 그의 뒤를 따른다.)

세번째 킹 메이커에 도전하는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 그는 다수파인 민 주계를 제치고 자신이 미는 이회창씨를 대통령 후보에 당선시켰다. 이번 에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그래서 정치권에는 ‘김윤환 가는 곳에 대세 있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 모 야당의 총재도 그의 이러한 가치를 인정해 “여당에서 두번씩 킹 메이커를 했으면 이제는 나의 킹 메이커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고문에 대한 정치권의 평가는 상반된다. ‘대세와 순리의 정치 인’이라는 평을 받는 반면에 반대자들은 ‘권력의 양지만 쫓는 정치인’ 이라고 혹평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며, ‘김윤환 정치’를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가. <한겨레21>은 5공과 6공,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3개 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에 있었고, 이제 또다른 정권 탄생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정치인 김윤환을 파헤쳐봤다.(편집자주)

7월21일 신한국당 전당대회가 열린 올림픽 체조경기장 내 이회창 후보의 전략 회의실. 1차 투표가 끝난 뒤 핵심 참모들이 모여 개표상황을 점검하 면서 2차 투표에 대비한 내부 전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헤드 테이블 좌우 양쪽에는 이회창 후보와 김윤환 고문이 나란히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상 황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숙의하고 있었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탄생에 대한 김윤환 고문의 역할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남후보 배제론으로 반이회창에 맞서

허주(김 고문의 아호)의 킹메이커 역은 이번이 세번째다. 5공 후반기에 청와대 정무수석과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 로 노태우씨가 선정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덕으로 그는 친 구인 노태우 대통령 아래에서 두번의 정무장관과 두번의 원내총무, 그리 고 당 사무총장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허주는 이어 노 전 대통령의 뒤를 민간인 출신의 김영삼씨가 이을 수 있 도록 직간접적인 노력을 다했다. 그는 권부 내 반대를 무릅쓰고 소수파인 김영삼씨의 대통령 후보 당선을 위해 직접 후보추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 그의 지원이 김영삼씨의 당내 승리에 결정적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 다. 민주계의 맏형이었던 최형우 의원은 당시 한 모임에서 허주의 도움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허주 선생”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 ‘허주 선생’은 역설적이게도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오랜 외 유와 칩거를 해야했다. 김영삼 정부의 사정작업과 과거청산의 칼날이 유 신 말기인 79년 10대 때 유정회로 정계에 진출한 뒤 12·12 쿠데타 세력 이었던 신군부의 친구였던 관계로 5, 6공에서 승승장구했던 그의 정치적 존재를 끊임없이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과거 기득권 세력으로 서 ‘역사의 검증’을 받는 기간이 필요하다”며 스스로 몸을 낮췄다.

하지만 허주의 화려한 복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94년 지자 제 선거에서의 여당 참패는 노련한 정치인인 허주를 정무장관으로 복귀시 켰으며, 이어 여권의 텃밭인 대구 경북 지역의 이반 현상은 그를 96년 8 월 당 대표직에까지 밀어올린다.

세번째 킹 메이커에 나선 그의 상황은 과거 두차례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 과거와 달리 그 자신부터 당내 소수파로 전락해 있었으며, 정치환경도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다수파인 민주계는 심지어 그가 미는 이회창 후 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래서 다른 후보간에 반이회창 연대가 형성 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허주가 사용한 카드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대세론의 전파였으며, 다른 하나는 조직이었다. 지난해 8월 “이 번에 또 영남인사가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곤란하다”고 영남후보 배제론 을 들고 나온 것이나 지난 3월 출범한 이회창 대표체제에 대해 “이회창 체제를 지지한다”고 힘을 몰아준 것, 그리고 당내 경선 막바지에 “이회 창 지지가 김심이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은 모두 ‘이회창 대세론’ 확 산을 위한 단계별 전략이었다.


왜 ‘가이진김’이냐 ‘가김진이’지

조직적인 도움은 은밀하면서도 치밀했다. 지난해 6월 자신이 이끄는 ‘21 세기 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었던 서상목 의원이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 는 것을 ‘허락’했다. 약 한달 뒤쯤 상근연구원이던 허경회 경제학 박사 가 이회창 캠프에 가는 것도 수용했다. 자신의 연구원이 비는데도 자신의 인재들을 이회창 캠프에 사실상 ‘보낸’ 셈이다. 또 지난해 연말에는 하 순봉, 변정일, 김영일 의원 등 허주계의 중진들을 이회창 캠프에 합류시 켰다. 이회창 후보 경선대책위는 민주계 모임인 정발협에 대항해 허주가 만들었던 나라회의 핵심 인사들이 주도했다. 이회창 경선대책위 부위원장 을 맡았던 양정규 의원을 비롯해 조직위원장 김태호, 홍보위원장 강재섭, 상황실장 윤원중 의원 등이 그들이다.

이수성 고문은 경선운동 당시 이러한 이회창 후보 진영에 대해 “5, 6공 세력과 결탁한 수구연합”이라며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김윤환 고문이 수렴청정하는 가이진김(假李眞金) 정권이 될 것”이라고 공격했다 . 허주는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서 “굳이 그런식으로 표 현하자면 진이가김(眞李假金)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이회창 후보의 진면목이 제대로 정치에 투영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그러나 허주는 ‘이 후보와 자신은 정치 파트너’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또 “앞으로 당내 세력은 재편될 수밖에 없으며, 이 후보의 정치적 주류는 어디까지나 허주계”라고 주장한다. 앞으로 이 회창씨에게 ‘가김(假金)’으로만 머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허주가 이회창을 통해 구현하기를 바라는 정치는 무엇인가. 그는 이를 한 마디로 ‘제도적 민주정치’라고 표현했다. 상대를 인정하면서 공존하는 정치, 나아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통 해 권력을 분립하는 정치라는 것이다. 겉모습은 대통령책임제이지만, 실 제로는 내각과 당에 실질적인 권한을 주고 국정을 운영해야한다는 것이다 . 그중에 하나는 자신이 떠맡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공존의 논리’ 야권에서도 인정

어쨌든 허주는 힘의 논리가 지배했던 5, 6공 군사정권에서 성장한 정치인 으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공존의 논리’를 강조한다. 야당을 무시하 거나 배제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지도 않는다. 96년 4.11 총선이후 과 반수에 미달한 정국 운영문제를 놓고 김 대통령이 무소속 당선자의 영입 을 서두를 때 그는 이에 반대했다. 그보다는 사안별로 야당과 손잡는 ‘ 정책 연합’방식을 제안했으나, 도리어 김 대통령으로부터 ‘약한 사람’ 이라는 꾸지람만 들었다. 정치를 ‘상대가 있는 게임’, ‘가능성의 예술 ’이라고 보는 그의 시각과 김 대통령의 관점이 충돌한 한 실례다.

그가 중국의 주은래를 존경하는 것도 뜻밖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얘기 를 들어보면 그의 정치에 철학적인 뿌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 두환 정권 말기에 당시 야당의 대표성을 누구로 인정해야 하는가를 놓고 정권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지요. 그때 장세동 안기부장 등은 이민우 신민 당 총재를 상대로 해서 정국을 우회하려고 했었지요. 그러나 나는 야당의 실질적인 리더인 김영삼 김대중씨를 상대로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했었 죠. 그들을 정치 상대로 인정해서 대화했더라면 상황이 6월항쟁까지는 가 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야당의 실질적인 리더와 타협하고 대화했더라도 결과는 6·29선언의 내용과 똑같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사회 적 갈등이나 분열 등 긴장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그의 이런 면은 야권 인사들도 비교적 높게 평가하는 부분이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 재는 언젠가 “허주 같은 합리적인 사람이 여당에 있기에 대화가 통한다 ”고 말했으며, 김근태 국민회의 부총재도 사석에서 “암울했던 시기에 여권 내부에 김 선배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정치가 조금씩이나 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평했다.

정치인 김윤환은 우리 정치사에 있어 유례가 드문 독특한 인물이다. 군사 정권에서부터 문민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격변기를 살고 성격을 달리 하는 정권을 거치면서도 한때 잠시 비켜서있기는 했지만, 한번도 낙마하 지 않고 권력의 정점에 남아있었다. 부도옹으로 불렸던 중국의 등소평조 차 정치적 숙청을 수차례 겪었던 점을 감안하면 허주의 정치인생은 실패 를 모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당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대 규모 자기 계보를 형성해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제 아래에서 대권 도전의 깃발을 든 적이 없는 그의 주위에 사람이 몰리는 데 대해 그를 따르는 한 의원은 “허주는 합리성과 상식을 바탕으로 정치를 물 흐르듯 한다”며 “그를 따라가서 최소한 손해보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허주가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감정에 기대는 정치를 노골적으로 하고 있지 않는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물론 그도 당 대표 시절인 지난해 말 5·18특별법 제정 때는 탈당까지 검토했었다. 탈당해서 TK 신당을 만 드는 것이 개인적인 입지에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결국 포기 했다. 외부에서는 이를 두고 그에게 '탈당할 수 없는 무언가 약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빈정댔다. 이에 대해 그는 TK 신당이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 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허주계의 주요 멤버에 TK 출신이 별로 많지 않은 대신에 경남과 충청, 강원, 제주 등 각 지역 정치인이 비교적 고르게 있다.


실패… 더이상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허주는 ‘그가 만든 2명의 대통령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평을 굳이 부인 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국민 다수가 동의 하는 최선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밀었지만, 집권 이후 그들이 최고 통치권자로서 ‘멋대로’ 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으며 그렇게 저항 할 만한 힘이 자신에게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허주는 이회창 대표에 대해서는 “원칙에 충실한 합리주의자”라 며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결코 독선적으로 혼자 해나갈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칼자루 잡은 사람이 마음을 바꿔먹으면 어쩔 수 없 지만, 만일 그런 상황이 진짜로 온다면 이제는 나도 내 목소리를 낼 것” 이라고 말했다. 허주의 ‘순리’와 이회창의 ‘정치’가 어떻게 접목될지 주목된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8월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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