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김윤환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현실은 돛대 순리는 삿대

(사진/신한국당 경선 포기 선언. 되는 쪽을 밀은 것이 아니라 다수의 반대를 딛고 되어야 될 사람을 선택해왔다는 것이 킹 메이커 김 고문의 논리다.)

올해 65세의 김윤환 고문. 그에게는 대세주의자, 순리파, 현실주의자 등 많은 형용사가 따라다니지만, 스스로는 ‘순리의 정치인’으로 불리는 것 을 가장 좋아한다. 순리(順理)란 글자 그대로 상식을 거스르지 않고 이치 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정치 인생을 살펴보면 ‘순리의 정치인’이라는 명칭이 별로 틀린 말이 아니라는 데에 대해 대부분 수긍한다. 경쟁자들은 그것을 '순응'으 로 바꿔 부르지만. 그의 정치 입문은 유신말기인 79년 10대 국회에 유정 회 의원으로 시작됐다. 9대 선거 때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무소속으로 출 마했다가 낙선한 뒤 지역구를 갈고닦던 그를 고향선배인 박정희 당시 대 통령이 불러 “총선 이후 신현확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하려고 하는데 신씨 의 고득표를 위해서는 당신이 출마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대신 유정회로 들어오라”고 당부해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제도적 민주인사’

어쨌든 유신독재의 한 버팀목이자 부산물인 유정회 의원으로 진출한 사실 은 그가 일정 부분 박 전 대통령의 독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것만 으로 본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체제에 순응했던 현실주의자였다. 이에 대 해 그는 ‘체제내 변화’를 추구했던 ‘제도적 민주인사’라고 주장한다.

79년 YH 여공농성사건 이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외신기자회견을 빌미삼아 박정희 정권이 김 총재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려 했을 때 그는 공화당과 유정회의 합동 의원총회에서 “YS를 제명하면 정권을 내놓을 각 오를 해야한다”고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발언을 했다. 12·12 쿠데타 이 후 친구들인 전두환 노태우씨 등 신군부 핵심인사에게 신당 창당과 관련 해 ‘군부와 옛 여권, 옛 야권을 각각 1대1대1의 지분으로 참여시키자’ 는 제안을 한 것도 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이 제안은 권정달씨가 주도하는 그룹에 의해 거부되고 군부 주도의 민정당이 만들어 진다.

허주의 온건 정책은 그가 실권자의 위치에 올라가면서 실질적인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말기 정무수석으로서 6월항쟁을 진압하 기 위한 위수령 발동이 검토될 때 그는 이를 적극 만류했으며, 직선제 개 헌을 받아들이도록 전두환 대통령과 당시 노태우 후보 양쪽을 설득시켜 파국을 막는 데 상당한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 고문은 “사람 특 히 정치인을 평가하는 것은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 떤 구실을 했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며 “당시 체제내 제 도적인 민주화 세력이 없었다면 헌정중단은 명확했다”고 말했다.

허주의 순리 정치가 꽃을 피웠던 것은 노태우 정권 5년 동안이었다. 순리 나 합리는 평화시에 돋보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 정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정치사적으로는 독재정권 의 틀을 벗고 민주화를 지향하는 과도기적 평화기였음은 분명하다. 4당체 제 여소야대 정국에서 원내총무를 맡은 허주는 3야당의 총무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절충의 정치’로 돋보였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타협과 조정 의 명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 4당체제에서 우리 국회는 헌정사상 가 장 높은 생산성과 타협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정치는 대체로 민의라고 하는 국민의 뜻을 존중하고 있다. 그의 한 측근은 “허주가 민의를 거스르는 행보를 했다면 그의 정치 생명은 벌써 끝났을 것”이라며 “민의라면 자기의 생각도 뒤로 돌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각제론자인 그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 니냐”면서 주요 고비마다 대통령제의 손을 들어준 것은 이런 면 때문이 라는 것이다. 90년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씨가 내각제 각서 파동에 반발했 을 때 그는 “야당이 반대하는 한 내각제 추진은 하지 못한다. 무리하게 추진해서는 안 된다”며 여권내 내각제론자들의 공세를 앞장서 차단했다.

줏대없는 해바라기 정치 비판도

그러나 물 흐르듯 부드러운 그의 처신과 철학은 대세를 추종하는 대세추 수주의자로 종종 비치기도 하는 부분이다. 줏대도 없이 ‘되는 쪽’을 무 조건 따라가서 손을 들어준다는 비판이다. 그 결과 정권을 넘어선 부귀영 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시대적인 명분과 당위가 없는 순리가 어떻게 먹혀들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되는 쪽을 뒤따라 간 것이 아니라 92년 김 대통령 때나 이번에 이회창 후보 때나 모두 다수 파의 반대 속에 ‘되어야 하는 사람’을 어렵게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 했다.

하지만 90년 말 원내총무 시절 예산안 날치기 처리를 진두지휘하는 등 민 주주의 원리에 명백히 어긋하는 행동도 때로는 조직의 논리라는 이름 아 래 적극 담당하기도 했다. 확고한 원칙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무 난하고 평균적인 것을 추구하고 따르는 ‘나약한 순리론자’라는 지적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김종철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