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놀이시설의 공포를 꾸미는 사람들

(사진/`전설의 고향'분위기가 관객을 압도하는 서울랜드의 `귀신동굴'. 사후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공포를 만끽한다.)

16세기경 중세 유럽의 한 낡은 성에는 악명높은 성주가 살고 있었다. 성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백성들을 악마의 제물로 바친다. 성주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이글대는 불속에 성 주를 던져 버린다. 그러나 5백년 뒤 이 성을 찾은 관람객이 실수로 녹슨 촛대에 손가락이 잘리면서 떨어진 피가 수백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성주와 악마들을 깨운다. 관람객들을 악마의 제물로 바치기 위한 성주의 음모가 또다시 시작된다. 자신도 모르게 만찬장으로 안내된 관람객들은 헤드폰을 끼고 저주받은 고성에서 공포의 만찬을 경험하게 된다.

만찬장의 칠흙같은 어둠과 헤드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귀기어린 소리들이 관람객들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바람에 흔들려 덜컹거리는 창문소리, 천둥소리, 성주가 쇠사슬을 끌며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소 리, 갑자기 접시가 깨지는 소리 따위가 실제의 현실처럼 생생하다. 성주 가 “이놈(관람객)을 먹을까, 저놈을 먹을까” 입맛을 쩝쩝 다시며 바로 옆에서 도끼를 휘두르는 대목에서는 등골이 오싹해진다. 여기저기서 관람 객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귀기어린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롯데월드 ‘유령성의 초대’는 음향효과만으로 공포감을 느끼게 만든 놀 이시설이다. 시나리오와 설계를 담당한 개발실 김춘환 과장(37)은 “테마 공원에서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세계 처음”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그가 이런 공포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 롯데그룹에 공채 로 입사해 롯데월드로 인사발령을 받았고, 롯데월드에서 놀이 시설물을 관리했던 것이 그의 이력의 전부다. 그런데 2년 전 개발실로 옮겨오면서 그에게 맡겨진 첫번째 임무가 공포물을 만들어 보라는 거였다. 앙케이트 조사를 해보니 공포물에 대한 수요가 의외로 많다는 게 이유였다.

95년 말부터 96년 말까지 1년 내내 공포물 제작에 매달렸다. 사람을 겁주 는 방법만 연구한 것이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공포물의 전형이 하얀 소 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귀신이었다. 하지만 한국귀신은 관람객들 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어 웬만큼 기발한 착상을 하지 않으면 먹혀들지 않 을 것 같았다. 드라큘라 따위의 서양귀신도 마찬가지였다. “고정된 틀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수도원과 같은 신비스런 분위기, 봉 건영주들의 학정 따위를 뼈대로 시나리오를 작성하게 됐죠.”

시각적인 효과와 청각적인 효과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공포감을 극대화하 는 것도 난제였다. 공포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 다. 어릴적 기억을 조금씩 반추해 봤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컴컴 한 밤, 방안에 혼자 있으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에도 깜짝깜작 놀라 곤 하지 않았던가. 또하나, 텔레비전의 납량물보다는 라디오로 듣던 납량 물이 더 무서웠다. 공포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상상력을 발휘하 는 데는 청각적인 자극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래서 음향효과만으로 공포 물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소리의 원근감을 살리는 입체음향 기술 이 발전돼 공포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뒤로는 대본을 작성했다 다시 뜯어고치는 고된 작업이 이어졌다. 내레 이션이 길면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에 적당한 분량으로 자른다. 음향효과는 가능한 많이 집어넣는다. 시체를 아삭아삭 씹는 소리는 다른 음식물을 먹는 소리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대본에서 삭제한다. 또 소 품을 연구하기 위해 서양 중세시대에 쓰였던 고문기구와 중세기사의 복장 을 연구한다. 이렇게 해서 ‘유령성의 초대’가 완성됐다. “만들고 나니 난산을 하고 난 느낌이었요. 비명을 지르는 관객들의 표정을 보고는 그동 안의 고생이 사라지더군요. 덕분에 공포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갖게 됐습 니다.”

충격적인 장치 곳곳에 마련 지옥 연출

서울랜드의 ‘귀신동굴’은 ‘유령성의 초대’에 비하면 고전적이다. ‘ 전설의 고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권선징악의 메시지도 강하다. 소 복을 입은 처녀귀신, 염라대왕, 아비규환의 지옥의 풍경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공포의 대상들이다. 하지만 막상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심장을 오그라뜨릴 만한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갑자기 불이 꺼지며 사방이 어두컴컴해진다. 천장에서는 “여러분을 지옥으로 안내하겠다”는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덜컹덜컹 위아래로 기분나쁘게 흔들거리는 엘리베 이터를 타고 동굴입구에 도착하면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 가짜인데 뭘’ 하고 짐짓 태연한 척 마음을 가다듬지만 손바닥에는 어느 새 땀이 밴다. 그때 갑자기 치렁치렁한 검은 망투을 걸치고, 검은 복면을 한 저승사자가 꽝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다. ‘끼약~’ 관람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친다.

컴컴한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포감이 고조된다. 관뚜껑이 삐걱거리 며 열리면 처녀귀신이 입에 피를 흘리며 나타난다. 옆에는 죽은 사람을 염해 놓은 모습이 보인다. 무덤 근처에서 들리는 여우 울음소리와 온갖 동물의 울음소리가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동굴 벽면에서는 잘린 팔과 다 리가 불쑥 삐져나온다. 지옥에 다다르면 고통받는 인간의 비명소리와 염 라대왕의 웃음소리가 머리카락를 쭈뼛쭈뼛 서게 만든다. 죽음과 사후의 세계라는 미지의 세계가 가져오는 공포감인 것이다.

귀신동굴의 시나리오를 쓴 서울랜드 한덕개발 장제훈 상무(49)는 한국방 송공사 예능국 구성작가로 있다가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한다. “서울 랜드에서 시나리오 의뢰가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귀신동굴을 폼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가능한 한 공포스럽고 전율스럽게 꾸미려고 했죠. 천장에서 잘린 손이 내려와 관람객들의 몸을 한번 훑고 지나간다든 가, 웅덩이에 푹 빠지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외국의 테마공원에 설치된 공포물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귀곡별장에는 아름다운 왈츠가 흐른다. 공동묘지에서는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 공포감을 주지만 이내 아름다운 합창을 한다. 오락적인 요소 가 가미돼 있는 것이다. “테마공원은 가족들이 찾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불쾌감을 줄 정도로 너무 공포스러워서는 안 되죠. 공포를 즐겨라! 귀신 동굴을 한번 보고나서는 공포를 툭툭 털어버리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껏 웃을 수 있는 그런 시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귀신과 입맞추며 뜨겁게 포옹한다

시나리오와 설계를 끝내고 미국의 한 회사에 귀신의 모형제작을 맡겼다. 사실 귀신이라기보다는 로봇이다. 눈을 깜박이게 하거나 손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전기신호를 받는 미세한 실린더를 장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로봇제작을 마쳤다는 미국쪽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염 라대왕의 모습이 흑인과 비슷했다. 얼굴은 새까맣고 입은 삐죽나온 것이 영락없는 흑인이었다. 처녀귀신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리스 신화 에 나오는 조각들처럼 툭 튀어나온 이마에 쌍꺼풀을 한 서양 미인형이었 다. 처음부터 다시 조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귀신을 만들었으니 도깨비, 염라대왕, 처녀귀신이 무서울 리가 없다. 세상에 태어난 귀신들이 얼마나 이쁜지 볼에 뽀뽀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귀신동굴에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공포를 체험한 적이 있다. 개장을 앞두고 동굴 속을 둘러보며 마지막 점검을 할 때였다. 그때 동굴 저쪽에서 저벅저벅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등에 식은땀이 뱄다. 아무 도 없는 동굴에 웬 발자국 소리일까. 동굴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죽인 채 건너편을 자세히 살펴봤다. 인부 한명이 아직도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동 굴 속에 남아 있던 거였다. 그는 귀신동굴을 완성하고 아예 서울랜드에 입사했다. 귀신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장 상무가 시나리오를 담당했다면 설계와 소품을 준비하는 것은 온전히 길병은 차장(41)의 몫이었다. 관람객들이 15분 동안 공포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길 차장은 염라대왕의 얼굴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온갖 민속도감을 다 뒤졌다고 한다. 염라대왕의 눈을 어느 정도 뜨게 할 것인가, 눈썹을 어느 정도로 치켜올리게 할 것인가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 한다. 처녀귀신의 눈은 몇번 깜빡이게 할 것인가, 눈만 깜빡이게 할 것인가 아니면 팔도 움직이게 할 것인가도 결정해야 한다.

그도 귀신동굴을 만들고 나서는 내친 김에 서울랜드에 입사했다. 건축학 과를 졸업한 뒤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가 귀신동굴 ‘용역’을 맡은 거였 지만, 하다 보니 공원설계에 흥미가 생겼다. “우리나라에는 공포물은 물 론이고 공원설계 전반에 대한 전문가가 없습니다. 공원설계라는 뭔가 새 로운 아이템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5분의 전율 위해 상상력 총동원

아직도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공원설계에 대한 시장 이 넓지 않다. 대규모 테마공원이래봤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공원설계에 대한 대한 수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공원설계 자체가 워낙 품과 비용이 많이 들어 웬만하면 외국의 설계를 그대로 들여 오는 형편이다. 하지만 디즈니랜드와 같은 거대한 공원을 직접 설계해 보 겠다는 그의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는 매일 귀신동굴을 바라보며 그런 야무진 꿈을 다진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