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맛기행	1997년08월07일 제 169호

함평 장터의 선지 비빔밥

(사진/함평 선지 비빔밥의 상차림)

음식이 어느 한 고장의 토속음식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실로 수많은 세월이 흘러야 한다. 그 지역의 풍토와 작물 등 자연환경과 더불어 사람들의 일 상 생활풍습에서 배어나는 지역정서 등이 그 고장 고유의 음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전라남도 함평의 선지국 비빔밥도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고창과 영광, 함평, 임실 등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서남단은 바다쪽으로 나지막이 내려앉은 지세가 드넓은 개펄까지 거느리며 그대로 비산비야의 낙토를 이루고 있다. 함평은 바로 그 한가운데 들어앉아 이같은 지형적 특성을 가장 실감케 한다. 그래서 고을 이름마저 두루 함(咸)자를 써 함 평이고, 그 뜻의 풀이도 ‘두루두루 고르게 화평한 고장’이다. 함평사람 들은 ‘함평천지’라는 말을 무척이나 자랑삼는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 듯 호남가(湖南歌)의 첫머리 역시 함평천지로 시작된다.

한참을 달려도 가리는 것 없이 파란 하늘이 사방으로 열렸고, 민틋한 들 밭은 조금 올라앉았다 싶으면 콩잎이 나부끼는 콩밭의 연속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콩잎이며 콩깍지가 좋은 소먹잇감이 되어 예로부터 함평 한우 하면 전국에서 알아줬다. 지금도 함평에는 일대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 선 다. 가정에서는 그 흔한 콩으로 일년 내내 콩나물을 길러 채소처럼 먹었 고, 여인들의 콩나물 다루는 솜씨는 대를 이어오며 고유한 맛을 창출해냈 다.

우연한 기회에 함평을 지나다 발견한 것이지만 함평의 선지국 비빔밥은 이같은 함평의 내력이 그대로 담겨 있다. 유명한 함평 한우고기와 콩나물 , 기름진 호남미가 삼박자로 주축을 이루었고, 여기에 숙명처럼 이어내려 오는 여인들의 정성과 간맞춤이 맛을 낸다. 막 솥에서 퍼내 기름이 반지 르르 도는 하얀 쌀밥에 즉석에서 데쳐 아삭아삭한 콩나물을 듬뿍 얹은 뒤 , 파란 애호박 무침과 빨간 육회가 올려진다. 함께 따라나오는 선지국은 맑은 장국에 선지만 두어점 들어 있고, 파와 마늘 다진 것을 넣고 담백하 게 끓여 국물이 투명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덧얹어 비비도록 맨고추장이 곁들여 나오는데 마치 인절미처럼 차지고 매콤하지만 짜지 않아 맛을 한 결 돋운다.

함평 장터에서 가장 오랜 화랑식당(0615-23-6677) 주인 김남순(70)씨는 음식점 내력을 자랑할 것이 못 된다며 굳이 사양하지만, 이미 40여년 전 부터 쇠전터 국밥집으로 불려왔다는 것이 주변의 설명이다. 예나 지금이 나 음식에 담은 정성이나 그릇이 그대로 이어온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퍽 소박해 보이는 음식이지만 회로 얹는 쇠고기는 그날 잡은 것 이다. 기름기가 없는 엉덩이와 허벅지의 살코기(精肉)만을 엄선한다. 밥 은 조금씩 자주 안쳐 언제나 금방 솥에서 퍼낸 밥을 원칙으로 하고, 콩나 물도 잘 다듬어 큼직한 다라에 담아놓아다가 그때그때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데쳐내 밥에 얹는다. 40여년을 이렇게 한결같이 해온다. 참 기름도 장터에서 그날그날 짜온다고 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큼직하고 두툼한 놋그릇에 썩썩 비벼놓은 비빔밥은 양도 알맞고 간도 제 대로 맞아 전혀 시골 장터음식같지 않게 깔끔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경지 다. 선지국도 가능한 한 선지를 수저로 꾹꾹 찍어 국물과 함께 먹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선지에 대한 선입견이 깊어 기피하는 경향이 많지만, 빈혈을 막는 첫조건인 철분 섭취원으로 간이 으뜸이고 다음으로 선지를 꼽는다. 특히 철분 흡수력이 빠르고 중금속의 피해를 예방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함평은 지금도 5일장이 예전처럼 서고 이때 우시장도 따른다. 매달 2일과 7일이 장날이어서 가능한한 장날을 맞춰 찾아보면 더욱 보람된 나들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