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노동계 분노 부르는 포철의 위장정리해고

지난 3월10일 노동계는 석달 동안의 파업투쟁을 통해 날치기 노동법에 포 함됐던 기업의 양도·인수·합병에 의한 정리해고를 크게 완화시켰다. 생 존권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맞선 결과였다. 당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하며 이 조항의 관철을 끝까지 고집하던 자본쪽도 결국 노동계의 이 런 저항에 밀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을 때’라는 애매한 표현을 담은 정리해고를 그것도 2년 유예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현재 노동과 자본은 노동 현장 속에서 또다시 정리 해고 문제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정든 일터에서 그대로 일하게 해달라!” “위장 정리해고 철회하고 고 용승계 보장하라.”

‘노동승계 의무 없다’ 계약서에 못박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삼미 본사 1층 스테인레스강 전시실에서는 몇개월째 이런 외침이 들려온다. 지난 2월 평생을 일해온 창원의 삼미특수강이 포 항종합제철로 매각되면서 갈 곳을 잃은 삼미특수강 노동자 1백70여명이 포철을 상대로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며 7월1일 현재 1백일째 상경투쟁 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비극은 날치기 노동법에 맞선 총파업이 한창이던 지난 2월17일, 적자와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삼미특수강 경영진이 전체 회사의 80%에 이 르는 강봉 강관 공장을 포항종합제철의 계열사인 창원특수강에 전격 매각 하면서 시작됐다.

매각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지난 96년 12월부터 매각 대상 공장에 근무하 는 2천3백42명의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배제한 일방적인 공장매각에 반 대한다”며 “부득이할 경우 최소한 단체협약에 명시된 고용승계를 보장 할 것”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포철이 들이댄 편법 계약의 결과 이들의 요구는 묵살됐다. 삼미특 수강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지난 91년 8월 대법원이 고용승계 의무가 있다 고 판시한 ‘영업인도 계약’이 아닌 상법상의 ‘자산매매 계약’ 형식 을 택함으로써 삼미특수강에서 일하던 노동자에 대한 고용승계 의무를 회 피한 것이다. 더욱이 계약서에 “포철이 삼미의 근로자를 인수할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며 승계할 의무를 포철에 부담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 다”(제11조5항)고 못박고 “삼미 근로자들이 포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 해 포철이 손해를 입을 경우 삼미특수강이 배상해야 한다”(11조6항)고 배수진까지 쳐놨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나앉은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유해 위험 작업장에서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참고 기다리라는 회사의 말만 믿고 따랐는데 결국 피해는 우리가 본다”는 것이었다. 송철원씨는 “10 년 이상 국가의 기간산업을 떠받쳐온 우리의 일자리에 대한 배려는 손톱 만큼도 없이 우리를 기계보다 못한 하찮은 존재로 취급했다”고 한숨지었 다. 이들은 결국 3월24일부터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 또한 “새 노동법에 따라 기업 인수·합병 과정에서 정리해고가 금지되자 자산매각 형태로 대규모의 변칙 정리해고한 것에 지 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즉각 고용승계를 보장하라”고 거들었다.

그러나 포철의 입장은 단호하다. “삼미특수강의 영업권 전체를 포괄적으 로 양도받은 게 아니라 봉강·강관 공장의 자산만을 인수한 것이므로 기 존의 고용관계를 승계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노동계나 학계는 포철의 이런 주장을 정면으 로 반박하고 있다.

수습기간 둬 입맛 맞는 노동자만 선별 채용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박영삼 연구원은 “기업을 인수하면서 그것을 운용 하는 인력 자원을 인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포철의 행 위는 사실상 삼미특수강을 온전히 인수하면서 고용승계 부분만 거부하려 는 술책”이라고 규정했다.

실제 포철은 자산만 인수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운영 인력은 선별 채용했다. 계열사인 창원특수강과 포철산기 동우사 등 협력업체를 통해 이들 2천3백42명의 삼미특수강 노동자 가운데 1천7백70 명을 신규채용 형식으로 뽑은 것이다.

채용 과정 또한 변칙적이었다. 먼저 포철쪽은 신규채용 방법을 동원해 10 년 이상 근무해온 노동자들조차 3개월 동안의 수습기간을 거치도록 했고, ‘전형 결과에 대해 소송제기 등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습기간 평가 결과 회사가 정하는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즉시 퇴사한다’는 내용 의 각서를 요구한 것이다. 삼미특수강 김창남 노조위원장은 “기업 인수 에 따른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심리를 이용해 현대판 노비문서를 강요하고 결국 자신의 입맛에 맞는 노동자들만 선별 채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포철쪽은 이에 대해 은혜를 모르는 행위라고 맞서고 있다. “기존의 고용관계를 승계할 의무가 전혀 없음에도 고용안정 및 지역경제의 활성화 를 촉진하기 위해 수용가능한 최대 인원인 1천7백70명이나 채용했는데 오 히려 이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포철이 당초 채용키로 한 인원에 대한 약속조차 어겼 다고 주장한다. 포철은 매매 계약 당시 삼미쪽에 모두 1천9백78명을 채용 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하며 지원 한 1천9백38명의 노동자 가운데 1백68명을 탈락시켰다. 김창남 위원장은 “이들 탈락자를 포함해 모두 5백72명을 단숨에 정리해고한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이들을 떠안고 있던 삼미특수강 보전관리인(황선두)조차 “포철에 고용승계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이 들에게 자진사표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6월13일엔 이를 거부한 노동자 중 1백80여명을 전격 해고했다.

이제 삼미와 포철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신세로 전락한 이들 노동자들은 삼미와 포철을 오가며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힘겨운 농성과 시위를 계속하 고 있다. 하지만 포철쪽은 더이상 채용은 있을 수 없다며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포철의 한 관계자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 인수계약을 했 는데 몸집 줄이기는 필요한 것 아니냐”며 “무조건 다 받아들일 수는 없 으니 이제 문제가 있다면 법적으로 해결하라”고 말했다.

이런 팽팽한 맞대결 속에서 최근 이 문제는 사회문제로 확대되기 시작했 다. 지난 6월23일 민주노총,전국연합,민변,민교협 등 14개 노동·시민· 사회 단체는 ‘포철의 삼미특수강 위장 정리해고 철회 및 고용안정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공동대응을 모색하고 나선 것이다.

노동계, “위장 정리해고 두고보지 않겠다”

민주노총 윤후연 정책부국장은 “포철의 행위는 날치기 노동법 반대 투쟁 으로 백지화된 기업의 인수·합병에 의한 정리해고를 관철하기 위해 자본 쪽이 자산매각이라는 변칙적인 수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기 업의 인수·합병이 자주 발생하는 상황에서 중요한 선례가 될 수 있으므 로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오는 7월5일과 6일 전 국적인 공동집회를 통해 포철에 고용승계를 요구하고 각계 원로를 중심으 로 중재단을 구성해 해결을 시도할 계획이다. 그리고 포철이 계속 이를 거부하면 국제노동기구(ILO)등과 연계해 포철제품에 대한 국제 사회의 불 매운동까지 전개한다는 방침이다.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싼 소용돌이가 또다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한편 노동계에서는 현행 노동법의 미비로 발생하는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기 업의 인수·합병 때 인수기업에 고용승계의 의무를 노동법에 명시하는 입 법청원 운동의 필요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