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피에르 부르디외의 ‘TV권력 비판’에 프랑스 지식인 사회 발칵

(사진/텔레비전의 횡포와 여기에 동원된 철학자들을 맹공격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매스미디어 시대의 최고 권력자로 불리는 텔레비전과 대중매체에 영합해 “인기를 쫓는” 철학자들이 “금세기 최고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 외의 비판대에 올랐다. 최근 출간되어 꾸준히 비소설부문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르디외의 책 <텔레비전에 대하여>(Sur la tele vision)는 인기에 영합하는 현대 지식인들의 행태와 시청률에만 연연하는 텔레비전 방송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불과 1백쪽도 안되는 얇은 분량이지만, 프랑스 지식인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시청률 노예된 패스트 사상가들” 혹평

<구별짓기>의 저자인 부르디외는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콜레 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로 전세계 인터넷 토론포럼에서 하버머스, 존 롤스 등을 제치고 가장 많은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인 기있는” 학자이지만, 자크 데리다 등과 더불어 웬만해서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않는 학자로도 유명하다.

부르디외는 이 책에서 현대 저널리즘의 “저속한 상업주의”를 비난하면 서 “대중매체는 선택된 이미지만을 보여주며 사건을 단순한 대중적 흥미 거리나 스펙터클로 전환시켜 버릴 뿐”이라고 진단한다. 보도 대상의 선 택적 여과도 매체 특히 텔레비전의 횡포라고 비판한다. 한편 텔레비전 방 송은 시청률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되어 부단히 문제를 흥미 위주로만 몰고가고 있고, 여기에 이른바 대중적인 철학자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 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국내에도 잘 알려진 베르나르 피보와 정치인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기 소르망, 알렝 밍크, 자크 아탈리 같이 사상가들 그리고 알랭 핑키엘크라우트, 앙드레 글룩스만,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하는 유명 철학자들은 음식으로 따 지자면 패스트 푸드에 해당하는 ‘패스트(일회용)사상가’들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부르디외는 이들 특정 사상가들이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철학자들은 한번도 초대하지 않고, 어떤 철학 자들은 단골로 출연시키는 텔레비전 매체의 횡포가 더 무서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선별적 초대는 텔레비전이라는 거대 대중매체가 지식사 회에 자행하는 상징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또 어제는 보스니 아 문제를 이야기하고 오늘은 이민법안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내일은 또다른 프로그램에서 알제리 문제를 다루는 등 종횡무진 즉흥적인 사상들 을 유포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도대체 어떤 진지하고 깊이있는 철학을 발 견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더욱 나쁜 것은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들의 이런 ‘패스트 사상’이 현실을 바라보는 분석틀로 둔갑한다는 사실 이다. 부르디외는 결국 이들 유명짜 철학자들에게 즉자적인 패스트 사상 을 강요하는 주범은 다름 아니라 시청률이라는 괴물이라고 단정짓는다. “텔레비전 권력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주범”이라고까지 진단하는 부르 디외의 논지는 비슷한 맥락에서 텔레비전 등의 매스미디어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했던 칼 포퍼의 주장에 닿아 있다. 마지막으로 부르디외는 “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요원하다”며 “이른바 텔레비전 권력을 적절히 통제할 제도적 장치가 민주주의의 열쇠”라고 결 론짓는다.

“꽉 막힌 교조주의자” 반격

비판의 대상이 막대한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텔레비전과 대중적 철학자들 인 만큼 아무리 부르디외가 세계적 석학이라 하더라도 반격을 피할 수 없 다.

프랑스 최고 이공계 엘리트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닉의 철학 교수 알랭 핑 키엘크라우트는 이에 대해 “지적 오만에 빠져있다”며 심한 불쾌감을 표 시했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베르나르 피보도 자 신이 얄팍한 일회용 사상가로 비난한 부르디외를 “꽉 막힌 교조주의자, 대중적 성공과 열린 발언을 거부하는 오만한 자”라며 맹렬히 되받아쳤다 .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는 텔레비전을 “경계해야 할 민주주의 적 ”으로 인식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 면 응답자의 49%가 텔레비전의 보도에 신뢰를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나 타났다. 이는 선택적 여과보도라는 텔레비전의 횡포를 주장하는 부르디외 주장의 정당성을 뒷바침해준다.

부르디외의 주장을 둘러싼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열띤 논쟁은 대통령선거 가 있는 올해 전파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한국에 서도 타산지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파리/최연구 통신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