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한겨레21

이석과 이철용과의 거리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철따라 찾아오는 기후 변화처럼 올해도 또다시 광기 어린 마녀사냥철이 찾아왔다.

‘이석씨 폭행치사 사건’을 계기로 언론들은 학생운동에 대하여 처참한 융단폭격을 쏟아붓고 있다. 그 융단폭격 그늘에서, 경찰이 저지른 살인적 폭력은 깡그리 잊혀지고 매일 새로운 ‘이적단체’가 ‘적발’된다. 지식 인들은 똥물이 튈세라 “한총련 자숙하라” 이외의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


‘이적’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이적성’과 ‘폭력 및 부도덕’이 한총련에 대한 비난 내용이다. 우선 인권운동가로서 나는 한총련의 ‘이적’은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적’을 규정하는 국가보안법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 는 인권탄압법으로서 전세계에서 지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 해 출범식 과정에서 한총련이 주장했던 것은 ‘대선자금 공개’였으며 ‘ 이적행위’의 표징은 별로 없었다.

한총련의 폭력시위와 프락치 혐의자에 대한 폭행치사는 그 자체로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경찰 폭력에 대해서 그토록 무감각한 우리 사회가 왜 학생의 폭력에 대하여만 민감한지 알 수가 없다. 말할 나위 없 이 운동 품성 혹은 전술이라는 관점에서 한총련은 한낱 인권운동가가 ‘ 드라이한’ 눈으로 비판하는 것 이상의 신랄한 비판을 따로 받아야 할 것 이다. 다만 이 특별한 비판은 늘 학생운동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의 몫이지 학생운동에 대한 발가벗은 적개심 뿐인 검찰이나 언론의 몫일 수는 없다. 같은 과정에서 일어났던 경찰의 살인적 폭력과 그 은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그들이 학생운동의 ‘폭력과 부도덕’ 만을 떠들어대는 것은 가소로운 여론재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학생들의 폭력과 함께 경찰폭력에 대하여도 말할 의 무를 갖는다. 아니 ‘폭력의 전후 맥락을 따질 때 당연히 학생들의 폭력 보다 경찰의 그것을 훨씬 강도 높게 비판할 의무를 갖는다. 즉 평화로운 집회와 시위 요구, 그에 대한 막무가내의 불허, 무장한 경찰과 몸 가릴 것 없는 학생들과의 투석전, 막대한 진압장비와 초라한 화염병…. 세계 어느 나라 인권운동가도 경찰의 폭력에 먼저 관심을 가질 것은 명백하다.

일용직 노동자 이철용씨는 6월 1일 왕십리 사거리에서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백골단이 몰려와 순식간에 사거리를 점령했고 계속 시위대를 추 격하는 가운데 아무 생각없이 몸을 피하여 달음질친 이철용씨는 금세 4∼ 5명의 전경에게 잡혀 얼굴 부위를 집중적으로 방패와 군홧발과 곤봉으로 구타당했다. 이철용씨는, 이마와 왼쪽눈 위 뼈가 금이 가 함몰되었고 아 랫턱뼈가 부숴졌으며 군홧발로 목덜미를 차여 목뼈 2대에 금이 갔고 뇌 속에 피가 고여 뇌수술을 받아야 한다.

사건 직후, 이철용씨가 12년 전에 방위복무 중 탈영한 사실을 알아낸 경 찰은 군 수사대와 함께 이씨를 강제로 국군 통합병원으로 격리해 놓고 그 가 부주의로 빗길에 넘어져 다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가 일반 시민이기 때문이다. 중상을 입은 시위 가담 학생들은 당초에 이런 이야깃거리조차 될 수 없다.


‘프락치 여부’는 그냥 넘어가는가

이석씨와 이철용씨와의 큰 차이는 결과적으로 죽었느냐 살아 있느냐에 있 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권운동가에게 이 두 사건 사이의 거리는 더 아 득하게 느껴진다. 즉 국가권력의 공격적 폭력과 국가권력(진짜 ‘프락치 ’였든 아니었든)에 대한 방어적 폭력과의 거리, 수사권을 독점한 까닭에 사건을 은폐할 수 있는 가해자와 그렇지 않은 가해자와의 거리, 처벌되지 않는 가해자와 틀림없이 중형을 받을 가해자와의 거리, ‘도덕성’이 전 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경찰과 온 세상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받고 있는 운동 권과의 거리…. 이것은 멀고도 멀다. 공안기관이 방대한 프락치망을 운영 하고 있음은 상식이다. 물론 이석씨가 사실 프락치였다고 치더라도 학생 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부분을 덮어두고 학생들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하는 일 그 자체가 분명한 인권침해다. 망자와 그 가족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바치면서도 반드시 이 의혹은 규명돼야 하는 것 이다.

마틴 루터 킹은 “최대의 폭력 제공자인 정부에 대하여 분명한 목소리로 항의하지 않고는 빈민가에 사는 흑인들의 폭력을 비난할 수 없다”는 설 교를 남겼다(1967년). 나는 우리 정치권력의 폭력을 뚜렷한 목소리로 비 판하지 않는 그 어떤 언론도 지식인도 정치인도 시민운동도 이번 사태에 서 한총련의 폭력과 부도덕성을 비난할 도덕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한총련에 대한 저열한 여론재판은 이쯤에서 막을 내려야 한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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