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한겨레21

어두운 시대의 가벼운 책읽기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베스트셀러가 꼭 좋은 책 이라고 할 순 없지만(오 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어쨌든 한 사회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책들에는 작품성을 떠나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 베스트셀러를 통해 바라본 97년 상 반기의 한국사회, 한국사 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는 지난해에 이어 여전히 <아버지>였다. 지 난해 하반기 <좀머씨 이야기>를 밀어낸 <아버지>의 부상은 조기퇴직의 우울한 사회분위 기를 그대로 반영한 우 울한 결과다. 1백60만권이 나갔다는 <아버지>는 연극, 영화로도 제 작됐다. 김정현의 <아버 지> 외에도 이순원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아쿠타가와 상 수 상’의 후광을 업은 유 미리의 <풀하우스>, <가족시네마>, 김종윤의 <슬픈 어머니> 등 가족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역시 가족밖에”라는 이기 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는 점에서 그리 달갑진 않다. 이런 가족주의 바람의 외피는 보수와 복고 주의가 싸고 있다. 문단 외부에서 오히려 더 파란을 일으킨 이문열의 <선택>은 조선시대 사 대부 ‘장씨 부인’이라 는 가상인물의 삶을 통해 전통적 가부장제를 옹호한 작품이다.


시들지 않은 보수적 가족주의 바람

<선택>은 특히 앞머리에 장씨 부인의 입을 빌려 이 시대 여성에게 권하는 말이 있는데, 이 는 “나가서 설치지 말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요약된다. 당 연히 여성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고 문학성에서도 ‘이문열’ 이름 석자를 훼손한 듯한 <선 택>이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은 이문열의 건재한 인기, 논란이 불러일으킨 호기심 외에도 그 의 생각에 암묵적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불황기 자본의 요구를 대변”한 것?

보수주의와 근거리에 자리를 잡고 우리 사회에 바람을 불어넣은 건 ‘ 복고’였다. 복고바람의 특공대는 패션, 잡화 분야였지만 출판도 뒤따랐다. 이승은·허헌선 부부 의 인형전이 선풍적인 인 기를 끌었고 이를 그대로 옮긴 책 사진집 <엄마 어렸을 적엔…>도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엄마 어렸을 적엔…>에는 못입고 못먹던 시절, 새끼에 매단 연탄, 석탄 난로가 피어나는 시 골 초등학교 교실, 만화가게, 평상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수박을 먹는 모습 등 ‘그때를 아십니 까?’풍의 정감어린 표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때가 좋았지’라는 회 고조 추억은 이제 우리들 의 삶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왔다.

복고바람에 실려온 박정희 신드롬의 한켠에서 박정희의 삶을 그린 이인화의 <인간의 길>도 역시 서점가에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불황’과 ‘복고’로 얼룩진 사람들의 쓸쓸한 마음은 ‘따뜻한 이야 기’를 원했다. 4월부터 <아버지>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로 올라온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는 짤막 한 글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모음집이다. 이 책은 나름대로 세파 에 지친 시민들의 위로자 구실을 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경향은 소설과 비소설 분야 양쪽 모두에 서 나타나 생텍쥐페리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해인의 <사랑할 땐 별이 되고>(샘터 ), 원태연의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포리스터 카터의 <내 영혼 이 따뜻했던 날들>(아 름드리), 이창훈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싶은 책>(오늘의 책) 등 ‘사랑’과 ‘따뜻함’을 갈구한 책들이 많이 읽혀졌다.

시 분야에서 유일하게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 의 사랑>도 역시 이 러한 기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 해/평생을 두 마리가 함 께 붙어 다녔다는/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사랑하고 싶다”는 그의 고 백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사랑에 굶주려 있고 외로움을 타고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집이 인기를 끌면서 91 년 출간된 류시화의 예전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 다>(푸른숲)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고 이와 함께 그는 인도여행기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을 내놓고, <마음을… >의 공동역자로도 참여하는 등 올 상반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국내외 역사서 봇물… 창업관련서도 휘파람

외국소설로 돌풍을 일으킨 책은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 스>다. 기원전 1300년 경 고대 이집트를 무대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불렸던 정 복왕이자 건축왕인 람세 스2세의 일대기를 재현한 <람세스>는 이집트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시선을 ‘복고’ 를 넘어 아예 머나먼 태고와 이국에까지 닿게했다. <람세스>는 지난 해 고대로마를 그린 시오 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한길사)와 역사시대 이전 고대문명의 흔적을 찾아본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까치) 등이 땅을 갈아놓 은 덕을 많이 봤다.

국내역사에 대한 관심도 예전에 비해 높아졌다. <한 권으로 읽는 조선 왕조실록>, <한 권으 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등 들녁의 ‘ 한 권으로~’ 시리즈는 역사대중화에 앞장선 반면 역사에 대한 경박단소화를 부추겼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과는 상관없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청년사), <역사신문>(사계절), <이야기 조선왕조사>(청아), <한국사 100장면>(실천문학사) 등 간단한 역사읽기 서적이 몰아쳤다.

최근엔 <고구려 제국사>(혜안), <고구려 문화유적산책&g t(대륙연구소) 등 고구려 관련 책자들이 계속 나오면서 진정한 지도자를 찾기 힘든 이 나라 백성 들의 광개토대왕 갈망이 높아져 하반기엔 ‘고구려 신드롬’이 예견되기도 한다. 불황여파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집은 책은 단연 창업관련서, 재테크서적 이었다. 8년 동안 8개 업 종, 16개 점포를 운영해 초기자본 7백만원에서 자산 10억원을 모은 저자 의 경험을 담은 <돈 버 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 9년 동안 부동산·주식·채권 등에 투자해 18 억원을 벌어들인 공인회 계사 김희상씨의 <돈 좀 벌어봅시다>(길벗)가 대표격이다. 이들 책들 은 그저 책상 앞에서 머 리를 굴려 내놓은 창업매뉴얼이 아닌 실제 경험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 이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 었다. 이런 류는 <경제기사는 돈이다>(거름), 주병진의 사업성공담 < 건빵을 밑천으로 쏘주를 자산으로>(청아), <돈이 쏙쏙 벌리는 음식장사 이야기>(들녘), <부 동산 재테크 무엇이든 물 어보세요>(더난), <내 몸에 맞는 재테크>(김영사), 이규형의 <일 본을 읽으면 돈이 보인다 >(가서원), <손정의 경영스토리>(평범사) 등 끝이 없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싶은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일 것이 고 이는 자식교육으로 이어진다. 상반기 국내 EQ열풍은 ‘뭔진 모르지만 좋은 것’이라는 생 각에 학부모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원조격인 <EQ:감성지능개발학습법>(해냄) 외에도 <EQ 테스트북>, <동화로 배우는 EQ>, <감성지능 EQ>, <EQ자녀교육법>, <초등학생 EQ 전래동화> 등 온갖 EQ 서적이 범람했다. EQ신드롬은 남들이 좋다면 덮어놓고 쫓아가는 우리 사회의 경박단소(經薄 短小)화를 드러내주는 한 지표이기도 하다.

EQ수준을 벗어난 자식을 둔 학부모들의 관심은 단연 ‘공부’다. 지난해 40만부 판매를 기록한 서울대 수석합격생 장승수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김영사), < 초학습법>(중앙일보사) 등 공부요령을 다룬 책들이 여전히 많이 팔렸다. 지식을 철저히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한 편 그 도구마저도 또다른 도구를 이용해 얻으려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공부관이 드러나는 대목 이다.

외국어 분야에선 지난 3년 동안 이 분야의 수위를 놓치지 않았던 <꼬 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디자인하우스), <영어의 바다에 빠뜨려라>(에디터)를 제친 <헨 리홍의 영어발음 구구단 >이 새롭게 부상했다. 역시 영어 ‘요령’을 가르치는 책들이다. 일반인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또 컴퓨터가 있다. <안녕하세요 한글윈도 우 95 길라잡이>, < 안녕하세요 컴퓨터 길라잡이>(이상 정보문화사), <멀티미디어 홈페 이지 만들기>(한국컴퓨 터매거진), <인터넷>(영진), <인터넷 제대로 배우기>(민음사) 등 이 컴퓨터 서적 중 맹위 를 떨친 책들이다. 쉬운 컴퓨터 입문서가 많은 가운데 이젠 관심이 인터 넷쪽으로 옮겨가는 분위 기다.


지친 심신을 무엇으로 위로받을 건가

마지막으로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 건강법>(서울문화사)이 베스트셀 러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과 텔레비전이 만나 빚은 이 책은 건강 관련 서적 중 사상최고라 는 22만권이 팔려나갔다. 지난해 나온 <뇌내혁명>도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의 탈출구를 제 시하고 있는 건강서적이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쓰러지는 주위 사람들이 줄을 이으면서 가슴이 섬뜩해진 사람들은 황 박사의 재담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베스트셀러로 돌아본 한국사회의 오늘은 어두운 그늘이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지친 심 신을 위로해주고, 또 한편으론 다시 비상을 꿈꾸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베 스트셀러는 나름의 소임 을 다한 건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의 책임이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7월10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