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7월10일 제 165호

이유있는 일본의 질주

(사진/일본의 J리그 팀들은 공격적인 축구로 관심을 모으며 청소년 선수의 발굴.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80년대 일본축구를 일컬어 ‘교과서 축구’라고 했다. 빨빠르게 선진 축 구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응용을 못한 탓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특 히 한국축구는 일본축구의 이런 고지식함을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역전되고 있다. 서로 2002 월드컵 유치경쟁에 들어가면서 더 그랬다 . 요즘 국제축구연맹(FIFA)이 발표하는 세계 국가별 순위에서 한국은 40 위권에 그쳐 20위권을 유지하는 일본에 벌써 추월당했다. 최근 97세계선 수권대회에서 선진축구의 이론습득에 인색했던 한국이 브라질에 10-3 참 패를 당한 반면 일본은 8강 진출에 성공,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세계를 향한 야망… ‘타도한국’은 옛말

일본축구가 90년대 들어 발전의 페달을 힘차게 밟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한 가지 캐치프레이즈가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먼제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이 됐으면서도 스포츠, 그것도 단체종목에서 세계 제일이 될 만한 종목이 없다는 데 주목했다. 2차 세계대전부터 패권주의에 집착해온 일본은 미국 서 발원한 야구에서 세계정복을 꿈꾸다 결국 미국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 하는 걸 잘 알고 포기했던 터라 가장 보편적인 종목을 그 대안으로 택했 다. 그게 바로 1백98개 회원국에서 이뤄지는 축구였다. 따라서 목표도 높 게 잡았다. 아시아 정상이 아니었다. 92년 히로시마 아시안컵에서 우승, 일본축구 75년 사상 최고 성적을 거두었을 때 일본축구계는 “우리의 무 대는 아시아가 아니다”고 당차게 선언했다. 이전에는 ‘타도한국’이었 지만 이제는 ‘세계로 나가자’고 외친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93년 한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번째 로 출범한 프로 J리그를 살펴보면 이론축구의 발전논리를 잘 알 수 있다. 프로리그의 출범을 위해 80년대 중반부터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 리에A 등 축구 선진국의 기본틀을 철저히 연구했다. 88년 5월 프로출범 스터디그룹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프로화에 박차를 가했고 하나씩 공 개되는 밑그림은 치밀했다. 47개 현리그-9개 지역리그-일본축구리그(JFL) -J리그 등 밑에서 위로 이어지는 리그 전체 골격은 유럽의 정통성을 이어 받고 있다. 팀 창단조건만 봐도 한국처럼 성인팀 하나만 있으면 달랑 창 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1군이 있으면 2군(위성팀)이 있고 그 밑 에 18, 15, 12세 이하 각 연령별 유·청소년팀을 운용해야 J리그 회원자 격을 얻는다. 현재 일본축구의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의 발굴 육성에 프 로팀들이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축구계는 이들 꿈나무들에게 승 부를 걸고 있다. J리그 출범 전부터 각 지역 초등학교를 상대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펼쳤다. 야구는 어린이들에게 위험하니 협동심도 기르고 안전 한 축구를 특별활동시간에 권장하자는 것이었고 이는 대대적인 호응을 얻 어 축구붐이 일었다. 그런 관심 속에 유·청소년들은 방학을 이용해 브라 질을 비롯한 축구선진국에 축구유학을 다녀온다. 브라질에선 ‘깅기’라 불리는 축구기본기를 배우려는 열풍이 불어닥쳐 일본청소년들을 위한 축 구학교까지 생겨날 정도다.

팬들과 함께 하는 장기적 계획의 결실

그리고 일본축구는 한번 정한 원칙은 다소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묵묵히 지켜나가는 게 큰 강점이다. 올해 3월 한국을 방문했던 가와부지 J리그 위원장은 한·일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는 마당에 올해 5월께 일본은 코 리안컵에, 한국은 기린컵에 각각 번갈아 참가하자는 대한축구협회의 제안 에 대해 “우리는 몇년 뒤의 프로와 대표팀 일정이 잡혀 있어 갑작스레 바꿀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국축구의 즉흥성과 대조를 보인 사례였다. 최근 J리그 관중이 다소 줄어들자 ‘거품’을 걷어내려는 노력과 함께 99 년 1, 2부제 이원화를 통해 새로운 21세기를 준비한다는 취지로 ‘백년구 상’이라는 장기적인 플랜을 마련해 놓고 있다.

일본축구는 J리그 출범과 함께 삶의 일부로서의 건전한 축구문화와 철저 하게 지역에 뿌리를 둔 축구환경의 정착에서 발전의 추동력을 찾는다. 승 부를 생각하기 이전에 ‘재미있는 축구’ ‘즐기는 축구’를 통해 팬들과 호흡을 함께 하려는 노력, 또 지방분권주의가 발전한 나라의 특성을 살려 지역적인 축구붐 조성과 축구인들의 자치로 발전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어 우러지고 있는 일본축구는 2002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성숙된 비전을 제시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김한석/ 스포츠서울 체육1부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