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한겨레21

70년대 사람을 만난다

“결국 박정희 그의 당선만을 위한/ 대통령선거로 너도 나도 뒤숭숭해지 면/ 떴다 봐라/ 정의당 당수/ 코밑의 팔자수염/ 그 갈색 얼굴 가득한 실 없는 웃음/ 진복기 후보가 나타난다/ 반드시”(‘진복기’ 첫 연).

19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고 김대중의 시대였으며 김지하의 시대였다. 그러나 또한 진복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혈전 과도 같았던 대통령선거의 살풍경을 한 가닥 여유와 웃음으로 ‘물타기’ 했던 이 만년 대통령후보 역시 70년대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 는 것이다.

적어도 고은(64)씨의 인물 시집 <만인보>에 따르자면 그러하다. 지난 86 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 시집 시리즈는 최근 제13~15권이 나옴으로써 전 체 예정 30권의 절반을 채웠다. 새롭게 나온 세 권은 지난해의 제10~12권 에 이어 ‘70년대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시인에 따르면 올 가을에 나올 3권까지 더해 모두 9권이 70년대 사람들을 그릴 예정이다. 시인 자신의 삶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 1만명을 시로서 되살리겠다며 시 작한 <만인보>는 1만이라는 숫자가 3천으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취지에는 변함이 없다. 그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재현하겠 다는 작의 또한 변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 통치의 후반기에 태어난 시인이 일제 말에서부터 훑어내려온 이 인물 서사시는 전쟁기의 전북 군산과 충남 보령 등지를 그리다가 문득 1970년대로 관심을 옮겨왔었다. 50년대가 현실보다는 역사에 가까웠다면 70년대는 역사라기보다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의 일부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70년대를 만들었던 인물들이 여전히 90년대 현실의 중요한 일부가 되고 있다는 사정에서 비롯될 터이다. 김영 삼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 김수환 추기경, 시인 김지하씨, 소설가 송기숙 씨, 문학평론가 백낙청 교수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새로 나온 3권의 <만인보>에서도 시인의 관심은 여일하다. 노무현 서경석 유동우 이오덕씨 등 역사이자 현실인 인물들을 필두로 해서 민주회복국민 회의, 이화여대 ‘새얼’ 모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알몸 농성과 같은 역사적 단체 또는 사건,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역, 김제 망해사 등의 지리적 장소, 무릎연적과 에스컬레이터와 같은 물건, 여기에다가 김종서 와 백제 무왕, 홍길동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까지가 시인의 눈에 잡힌 70 년대를 그리는 데 두루 동원된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시집 <만인보>의 백미는 해당 시기 인물들에 대한 촌철살인 격의 묘사와 정의에 있다.

“응혈의 음색/ 투원반의 음향/ 슬픔도 슬픔이 아닌 의지//겨울공화국 나 뭇가지들에 바람이 걸려 울었다//양희은과/ 양희은의 비겁할 줄 모르는 통기타//치사할 줄 모르는 노래/ 이 셋이 시대의 자유를 꿈꾸었다 모두와 함께”(‘양희은’).

“구식 인쇄기의 인쇄지 넘기듯이 걸어가고 있다/ 사람이기보다/ 관념이 다//관념이기보다/ 관념의 1인칭 독백이 걸어가고 있다”(‘최인훈’ 전 문).

“내 의식의 전환기라는 점에서 나에게 고향이 되어준 70년대의 그 원시 공동체적인 인간군상”이라는 말로 시인은 70년대 사람들을 회고한다. 그 러나, 그 원시공동체는,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하나의 동아리로 묶기 어 려울 정도로 세포분열을 거듭했다. 그 공동체의 성원들이 ‘비판적 지지 ’와 ‘단일화’로 나뉘어 맞섰던 1987년의 대통령선거는 하나의 분수령 이었다. 6월19일 저녁 <만인보> 제 13~15권의 출간을 기념하고자 한자리 에 모인 면면들은 아직 확산 또는 해체되기 전의 70년대적 공동체에 대한 기억으로 언제나, 그리고 이미 하나였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문화부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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